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접종 사전예약 일정을 두 달 이상 늦출 뻔했던 접속 오류(먹통) 사태. 정부가 한번에 30만명만 접속 가능한 서버로 수백만명 예약을 받으려 한 게 원인이었다. 지난달 12일 50대 352만명 접속에 처음으로 예약 대란이 일어났고, 바로 한 달 후엔 18~49세 1770만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급하게 서버를 늘려야 했던 정부가 찾은 해결책은 ‘클라우드’였다.
“기존의 물리적 서버를 늘리는 방법으론 두 달은 걸렸을 일을 클라우드로 2주 만에 해냈어요. 클라우드가 없었다면 전 국민 백신 예약이 지금까지도 미뤄졌겠죠. 정부가 보안 문제를 이유로 도입하지 않았던 민간 클라우드의 중요성이 증명된 겁니다”
이한주 베스핀글로벌 대표는 지난 18일 서울 서초구 본사에서 가진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베스핀글로벌은 이번 먹통 사태 해결의 주역 중 하나다. 네이버가 제공한 클라우드를 질병관리청이 백신 예약에 쓸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고 예약 기간 관리·운영하는 역할을 맡았다. 지난해 3월 온라인 개학에 맞춰, 2000명 접속 규모였던 공교육 원격수업 시스템에 전국 초중고 학생 300만명 이상이 접속할 수 있도록 한 것도 베스핀글로벌이다.
◇ 클라우드 전문가가 아마존 CEO로…韓 IT도 체질 개선 필요
이 대표는 “이제 정부 정책을 시행하는 데도 클라우드가 쓰이기 시작했다”며 클라우드 산업 육성의 필요성을 대화 내내 강조했다.
“아마존이 유통 회사인 줄 알았더니, 클라우드 자회사(아마존웹서비스·AWS) 대표였던 앤디 제시가 지난달 그룹 전체 대표직에 올랐어요. 마이크로소프트(MS)·구글도 앞다퉈 사업을 키우고 있죠. 한국이 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클라우드 산업을 키우지 않는다면 IT 강국의 지위를 내려놓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클라우드는 물리적 서버 여러 대를 연동해 마치 거대한 1대처럼 작동하도록 만든 가상의 서버다. 렌터카나 숙박업처럼, 클라우드를 가진 기업은 이것이 필요한 다른 기업에 돈을 받고 원하는 기간 만큼 빌려줄 수 있다. 현재 AWS, MS, 구글, 네이버 같은 빅테크들이 시장 선점에 열을 올리고 있는 ‘클라우드 서비스(CSP)’ 사업이다. 클라우드는 가상의 서버지만 구현하려면 많은 돈을 들여 많은 수의 물리적 서버를 만들어야 한다. 대기업들이 CSP 진출에 유리할 수밖에 없다.
CSP가 클라우드를 만들었다고 다른 기업이 곧장 활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기업마다 구현하려는 서비스에 맞게 서버를 구축해주고 꾸준히 관리·운영도 해줘야 한다. 무엇보다 클라우드에서 작동하는 소프트웨어를 새로 개발하고 공급해줘야 한다. 이런 기업을 ‘클라우드 관리 서비스(MSP)’ 기업이라고 한다. 베스핀글로벌, 메가존클라우드 등이 대표적인 국내 MSP 기업이다. 클라우드를 스마트폰에 비유한다면 CSP는 삼성전자 같은 제조사고, MSP는 실제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쓰는 목적인 애플리케이션(앱)을 공급하는 회사다.
이 대표는 빅테크 속 한국의 기회를 MSP에서 찾았다. 거대 인프라가 필요한 CSP는 글로벌 빅테크들의 자본 싸움이지만, MSP는 현재 소프트웨어 개발처럼 한국의 중소 개발사들도 글로벌 무대에서 다퉈볼 만한 두뇌 싸움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서버가 클라우드로 전환되면 기존 물리적 서버용 소프트웨어 역시 클라우드용 소프트웨어로 대체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MSP의 글로벌 시장 규모는 1000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CSP(300조원)보다도 3배 이상 크다.
◇ ”美 CIA·펜타곤도 민간 클라우드 쓰는데 우린 보안 걱정”
이 대표는 “지금까지 클라우드 산업이 인프라(CSP) 경쟁이었다면 이제부턴 소프트웨어(MSP) 경쟁이 될 것”이라며 “정부가 토종 MSP 기업 육성을 지원해 이 거대한 시장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 대표가 말한 ‘정부 지원’은 구체적으로 정부가 먼저 민간 기업들의 클라우드와 소프트웨어를 구매해 사용하는 것이다. 정부는 ‘클라우드 전환’을 외치고 있지만 보안 문제를 이유로 민간 기업이 만든 클라우드와 소프트웨어 도입을 꺼리고 있다. 행정안전부가 CSP 기업처럼 자체적으로 ‘공공 클라우드’란 걸 만들어 내부 수요를 해결하려고 한다.
이 대표는 “미국은 중앙정보국(CIA), 국방부(펜타곤)가 먼저 나서서 (2013년부터) AWS 등 자국 기업의 클라우드를 도입했다”며 “CIA, 국방부가 쓰는 클라우드니까 다른 기업들도 안심하고 도입하기 시작했고, 클라우드 산업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한국 역시 이런 방식으로 산업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업계 요구에 정부도 차츰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공공기관에 민간 클라우드를 도입하고, 특히 민간 소프트웨어 구매 비율을 2025년까지 20%로 높이기로 했다. 민·관이 함께 참여하는 ‘클라우드 소프트웨어 추진협의회’를 지난 6월 출범, 업계의 요구에 맞게 규제 완화를 검토하고 있다. 이 대표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
◇ 창업 6년 만에 ‘글로벌 10대 MSP’…SK 최태원 인맥도 ‘화제’
이 대표가 클라우드와 MSP에서 비전을 찾고 회사를 세운 건 2015년의 일이다. 첫 창업은 아니었다. 이 대표는 1983년 아버지인 이해민 전 삼성전자 사장(현 베스핀글로벌 회장)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대에서 생물학을 공부했다. 졸업 직후인 1998년은 국내 IT 붐이 일던 때였다. 이 대표는 웹호스팅 전문 업체 ‘호스트웨이’를 세우고 전 세계 11개국, 고객사 100만곳을 둘 정도로 회사를 성장시켰지만 2012년 미국의 한 사모펀드에 회사를 5000억원에 매각했다. 유통 회사였던 아마존이 클라우드 사업에 손대는 걸 보고 IT 패러다임의 변화를 눈치챘다고 한다.
베스핀글로벌을 창업한 직후 삼성전자의 클라우드 전환 사업을 수주하면서 성장 발판을 마련했다.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2배 가까이 늘어난 2000억원을 기록했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가 선정한 글로벌 10대 MSP 기업에 동아시아에선 유일하게, 아시아에선 인도 업체 1곳과 함께 선정됐다.
올해부터는 글로벌 진출을 본격화한다. 중국, 미국, 중동, 동남아에 이어 지난 20일엔 일본 MSP 1위 업체 서버웍스와 합작사 ‘지젠’을 설립하고 현지 기업들을 상대로 클라우드 전환 서비스를 시작했다. 주력 상품인 클라우드 소프트웨어 ‘옵스나우’를 해외 업체들에 팔아 고객사를 현재 1500여곳에서 2025년까지 10만곳으로 대폭 늘리는 게 목표다.
이 대표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시카고대 동문으로도 유명하다. 최 회장이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은 후 제조업과 IT 산업의 교류가 필요하다는 공감대 아래, 이 대표가 최 회장의 러닝메이트인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단에 합류했다고 한다. 현재 IT 인사 중엔 이 대표와 함께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이 부회장단에 들어가 있다. 이 대표는 최 회장, 김택진 대표와 함께 이달 말 방영되는 SBS 예능 ‘대한민국 아이디어리그’에서 국가적 문제 해결을 위한 아이디어를 모으고 심사하는 심사위원으로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