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심한 견제 속에서도 중국의 반도체 생산 내재화 움직임에 가속도가 붙고 있다. 대만 TSMC와 한국 삼성전자 등이 10㎚(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 미세공정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과 별개로, 중국은 전 세계 시스템 반도체 수요의 95%를 차지하고 있는 14㎚ 이상 시장을 적극 공략하겠다는 방침이다. 반도체 패권을 중국으로 가져오겠다는 것이다.
6일 전자 업계와 해외 언론 등에 따르면 중국은 이미 28㎚ 반도체 양산에 성공한 SMIC를 중심으로 내년에는 14㎚ 칩 대량 생산에 나선다. 영국 정보기술(IT) 전문 매체 토탈텔레콤은 최근 "전세계 반도체 생산량의 70%를 소비하는 중국이 내년이면 14㎚ 칩 대량 생산에 들어갈 것"이라며 "세계 최대의 반도체 공급 국가는 향후 중국이 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보도했다. 앞서 지난 6월 중국 관영매체 환구시보는 "반도체는 전자 산업이 고속 발전하는 원동력이다"라며 "올해 28㎚ 대규모 양산을 시작으로 내년 말 중국산 14㎚ 반도체 제품이 양산될 것이다"라고 했다.
중국은 전세계 반도체 수요의 70%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 수요의 대부분은 해외에서 생산된 반도체에 의존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의 현재 반도체 전략은 해외 의존 반도체를 모두 중국 내 생산으로 돌리고, 나아가 글로벌 시장의 패권을 가져오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라고 했다.
중국이 14㎚ 이상 반도체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는 이들 반도체가 글로벌 수요의 95%를 차지하고 있어서다. 14㎚ 이상 반도체는 현재도 산업 전반에서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다. 중앙처리장치(CPU), 그래픽처리장치(GPU),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뿐만 아니라, 디스플레이 구동칩(DDI), 이미지센서(CIS), 전력반도체(PMIC), 자동차용 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MCU) 등에 모두 쓰인다. 때문에 중국은 10㎚ 이하 미세공정 경쟁에서 크게 앞서간 TSMC와 삼성전자를 빠르게 따라가지 않더라도 14㎚ 이상 반도체 시장만 제대로 공략할 수 있다면 반도체 패권 다툼에서 승산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 계획의 선봉에는 SMIC가 서 있다. SMIC는 글로벌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4위 기업으로, 생산 제품의 90%가 28㎚ 이상 반도체다. 여기에 중국 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토대로 내년 14㎚ 반도체 양산을 시작,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 빠르게 침투한다는 방침이다. 토탈텔레콤은 "SMIC는 올해 초부터 14㎚ 일부 제품을 소량 생산했지만 여전히 28㎚ 이상이 주력이다"라며 "중국 정부가 대규모 투자로 SMIC를 지원하고 있어 내년부터 중국의 14㎚ 반도체 국산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관건은 14㎚ 반도체의 수율(생산품에서 양품이 차지하는 비율)로, 생산 초기 얼마나 안정적인 수율을 확보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수율은 곧 반도체 제품의 경쟁력으로 보는 업계 시각에 따른 것이다. 중국 현지 언론인 시나파이낸스는 최근 "SMIC가 14㎚ 공정 수율을 95% 수준으로 개선했다"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려워 보인다. 업계는 글로벌 선두 기업들의 생산 초기 수율이 90%를 간신히 넘는 것을 고려한다면 SMIC가 수율 95%를 보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미국의 견제는 중국 반도체 굴기의 걸림돌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미국은 중국 반도체 업체들이 미국을 포함한 우방국의 사이버 안보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이유로 중국에 대한 다양하면서도 집요한 압박을 진행하고 있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에 반도체 미세공정에 꼭 필요한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중국에 팔지 말라고 한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요청은 중국 견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14㎚ 이상 반도체에는 ASML의 EUV 장비가 크게 필요하지 않아, 중국은 다른 반도체 장비 수입을 늘려가며 생산 기반을 자국 내로 끌어들이고 있다. 실제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는 지난해 중국의 반도체 장비 수입 규모가 187억달러(약 20조9400억원)에 달한다고 밝혔는데, 이는 전년 대비 39% 증가한 규모다.
중국의 14㎚ 이상 반도체 생산 내재화에 따른 국내 업체의 영향은 현 시점에서는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중국의 기술이 한국 기업에 뒤지고 있는 데다, 이미 한국 기업의 14㎚ 반도체 생산 기술이 성숙해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이 14㎚ 이상 반도체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하면 중국 세트 업체의 주문량 감소로 여기에 납품하는 한국 기업에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생산량이 늘어나 공급이 수요를 앞설 경우 전체 반도체 가격이 하락할 우려가 있다.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중국의 반도체 산업 확장 시도는 과잉 생산과 투자 비효율성의 위험을 야기하고 있다"라며 "이는 첨단 산업 분야에서 자립을 달성하려는 중국 정부와 전체 반도체 생태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