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소년단(BTS)이 출연한 웹예능에서 김치를 ‘파오차이(泡菜)’로 번역해 논란을 빚은 네이버가 해당 자막을 한 달째 여전히 방치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침을 따르고 있다는 입장이지만, 정작 문체부는 13일 “오히려 ‘신치’(辛奇·김치의 우리말 음역)라는 용어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논란은 약 한 달 전인 지난달 15일 네이버의 인터넷 라이브방송 플랫폼 ‘브이 라이브’에서 방영된 웹예능 ‘달려라 방탄(Run BTS)’ 142화에서 시작됐다. 여기서 BTS 멤버들은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배웠다. BTS 멤버 정국은 “‘달려라 방탄’은 해외 팬 여러분들도 많이 보기 때문에 (김치 담그는 법을) 한번 따라 해보셔도 될 것 같아요”라고 소개했다.
BTS까지 출연시킨 김치 홍보 영상이었지만 오히려 파오차이를 홍보하는 꼴이 됐다는 네티즌의 지적이 잇따랐다. 방송 시간 31분 동안 BTS 멤버들과 백 대표가 ‘김치’라고 말하는 모든 부분에 파오차이(泡菜)라는 중국어 자막이 달렸기 때문이다. 파오차이는 중국 쓰촨성에서 피클처럼 담가 먹는 절임 채소로, 중국은 김치도 파오차이의 한 종류라고 주장하고 있다.
◇ 네이버 “문체부 훈령 따랐다”…훈령상 ‘신치(辛奇)’도 가능
논란 직후 네이버는 “문체부의 외국어 번역과 표기 지침(훈령)을 참고해서 전문가들이 이렇게 번역한 것이다”라며 “(논란과 관련해) 국립국어원 등에 규정 검토 요청을 해놓은 상태다. 검토 결과에 따라 필요하면 자막을 바꿀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문체부는 이런 해명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날 문체부 문화예술정책실 국어정책과 관계자는 “훈령상 김치는 파오차이와 신치 모두 동등하게 번역될 수 있다”라며 “(논란 이후) 현재는 오히려 신치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현행 훈령을 따른다고 해도 네이버가 파오차이만을 고집할 이유가 없고 이를 문체부 탓으로 돌리는 건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파오차이’ 번역 근거 | ‘신치’ 등 우리말 음역 근거 |
문체부 훈령 제427호 ‘공공 용어의 외국어 번역 및 표기 지침’ 제10조(음식명) ‘음식명’이란 한국 고유의 음식 등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음식을 말한다. ② 중국어 4. 중국에서 이미 널리 쓰이고 있는 음식명의 관용적인 표기는 그대로 인정한다. | 문체부 훈령 427호 ‘공공 용어의 외국어 번역 및 표기 지침’ 제4조(언어권별 번역 및 표기 원칙) 언어권별 세부 번역 및 표기 규칙은 다음과 같다. ② 중국어 3.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순우리말을 음역할 수 있다. 나. 유사한 개념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전통성과 고유성을 드러내야 할 경우 |
‘공공 용어의 외국어 번역 및 표기 지침’을 정해놓은 문체부 훈령 427호는 ‘중국에서 이미 널리 쓰이고 있는 음식명의 관용적인 표기는 그대로 인정한다’(제10조 2항 4호)라고 규정하고 있다. 장기와 비슷한 체스를 서양장기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것처럼, 김치도 중국의 비슷한 음식인 파오차이 또는 ‘한궈(한국) 파오차이’로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훈령 제4조 2항 3호에선 ‘(중국에) 유사한 개념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전통성과 고유성을 드러내야 할 경우 순우리말로 음역할 수 있다’라고도 규정돼 있다. 김치와 유사한 개념으로 파오차이가 있지만 ‘우리나라의 전통성과 고유성을 드러내야 할 경우’라고 판단한다면, 농림축산식품부가 정한 우리말 음역인 신치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네이버 중국어 사전에서도 김치를 검색하면 첫 항목에 파오차이와 신치가 함께 표기된다.
훈령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파오차이와 달리 신치라는 용어는 명시되지 않아, 마치 파오차이만 공식 표기인 걸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문체부는 지난 1월 11일 보도자료를 통해 관련 규정을 언급하면서 “농식품부가 선정한 김치의 우리식 중국어 표기인 신치로 쓸 수 있다”라고 해명한 바 있다. 네이버는 이보다 5개월 뒤에 BTS 웹예능을 내보냈기 때문에 자막 작업 과정에서 이 해명을 충분히 참고할 수 있었다.
네이버는 “전에 말씀드린 것과 입장이 동일하다”라며 “문체부와 별개로 저희도 나름대로 정확한 표현을 찾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라고 했다. 해당 영상은 이날 기준 590만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 中 “김치는 파오차이, 파오차이는 우리 것”…”이젠 바꿔 불러야”
훈령상 파오차이를 사용 못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간 파오차이가 더 익숙한 번역이었다. 하지만 지난 수개월간 중국이 이를 악용해 ‘김치는 파오차이의 한 종류이고 파오차이는 중국의 것이므로 김치는 중국의 것이다’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는 만큼, 이제부터라도 김치와 파오차이를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지난달 초엔 GS25가 김치 주먹밥 즉석식품 이름에 파오차이를 병기했다가 구설에 올라 결국 해당 제품 판매를 중단하는 일도 있었다.
중국의 ‘김치 동북공정’은 지난해 11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시 관영매체 환구시보는 “중국 주도로 (파오차이가) 김치업 국제 표준(ISO)으로 제정됐다”라며 “(한국이) 김치 종주국이란 말은 이미 유명무실해졌다”라고 보도했다.
한 달 뒤인 같은 해 12월 농식품부는 “파오차이에 관한 국제 표준 제정과 김치는 전혀 관련이 없다”라고 반박했다. 영국 BBC도 “김치와 파오차이는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다른 음식이다”라며 “ISO 문서는 ‘(한국의) 김치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적시했는데도 중국 언론은 이와 다르게 보도했다”라고 비판했다.
중국은 외교부까지 나서서 노골적으로 도발을 계속했다. 지난 1월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내가 보기에 파오차이는 일부 소수의 몇 개 나라와 지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은 파오차이로 부르고 한반도와 중국의 조선족은 김치라고 부르는 것이다”라고 했다.
중국 언론은 바이두 백과사전에 나온 ‘한국의 김치는 삼국시대에 중국에서 전래됐다’라는 설명을 소개하기도 했다. 바이두의 잘못된 설명은 지난해 12월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항의한 후 바르게 고쳐졌다.
서 교수는 이날 조선비즈와 통화에서 “현재 파오차이와 신치 등을 모두 사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중국이 왜곡된 주장을 하는 상황에서 파오차이를 사용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라며 “정부는 김치의 중국어 표기를 다시 제대로 정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