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전자업계가 잇단 노동조합 설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생산직과 기술직을 넘어 사무직의 노조 설립이 확대되면서 회사들은 복수 노조 사이에서 위기감을 호소하고 있다. 교섭력을 높이기 위한 노조 간 경쟁이 고조되면서 매년 파업 여부가 주요 이슈로 떠오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7일 전자업계에 따르면 삼성디스플레이는 오는 21일부터 노조 간부 6명이 참여하는 제한적인 형태의 선제 파업을 시작한다. 삼성디스플레이 창사 첫 파업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무노조 경영 원칙 폐기를 선언한 후 첫 번째 삼성 계열사 내 파업이다.
삼성디스플레이 노조가 파업에 나서는 배경에는 임금 협상이 있다. 노조는 지난해 실적이 좋았다는 이유로 올해 기본인상률 6.8%, 위험수당 현실화, 해외 출장자에 대한 처우 개선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사측은 이미 노사협의회와 합의한 기본인상률 4.5% 이상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입장을 보였다. 노사는 수 차례의 협상을 진행했지만 끝내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다.
결국 삼성디스플레이 노조는 쟁의 활동으로 뜻을 모았고, 지난 15일 사측으로부터 협정근로자 명단을 확보한 상태다. 협정근로자는 노조에 가입한 조합원 가운데 쟁의 활동을 하면 안 되는 필수 근로자를 말한다. 노조가 사측에 협정근로자 명단을 요청했다는 건 파업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다만 삼성디스플레이 노조가 당장 전체 조합원을 대상으로 하는 전면 파업 나설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현재 노조 전체 조합원 수는 전체 직원의 10%에 해당하는 2400여명이지만, 전면 파업으로 노조가 얻을 수 있는 실익이 크지 않다는 게 노조 안팎의 평가다. 이 때문에 태업, 보이콧, 피케팅 같은 파업보다 한 단계 낮은 쟁의 활동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노조 간부만 참여하는 제한적인 파업과 한 단계 낮은 수준의 쟁의 활동을 병행할 경우 전체 파업으로 인한 부담은 피하면서 효과적인 의사 전달은 가능하다.
최근 전자업계에서는 사무직 노조가 연달아 설립되면서 노조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 SK하이닉스의 경우 그동안 1만5000여명 규모의 한국노총 산하 전임직(생산직) 노조가 주축을 이뤘는데, 2018년 1500여명 규모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산하 기술·사무직 노조가 추가로 생기면서 노사 갈등이 확산하고 있다.
SK하이닉스 기술·사무직 노조는 최근 성과평가제도와 관련해 사측과 생산직 노조의 논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입장이 배제됐다며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또 지난 14일에는 기술·사무직 노조에서 활동하는 전문직(전문대 졸업 후 정규직 입사) 직원 50여명이 별도의 '전문직 노조'를 설립하기도 했다. 전문직 노조 측은 그동안 자신들이 다른 직군과 비교해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전문직에게는 연봉 상한제가 적용돼 아무리 오래 근무해도 대졸 신입보다 연봉이 낮다는 게 이들의 불만이다.
LG전자에서도 지난 2월 사무직 노조가 별도로 결성됐는데, 이들은 생산직 중심의 기존 노조가 합의한 연봉 9% 인상안에 동의할 수 없다며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사측은 사무직과 기술직의 근로조건에 동일한 취업규칙이 적용되는 만큼 별도의 교섭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업계에서는 한 회사에 여러 노조가 생기면서 노조 간 경쟁이 고조되고 있고, 결국 노노(勞勞)갈등, 노사 대립이 현실화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전자업계 한 관계자는 "직원들의 처우와 복지를 향상시키는 노조 활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전자업계도 노조의 파업 리스크가 시작됐다는 점에서는 씁쓸한 게 사실이다"라며 "복수 노조의 눈치를 봐야 하는 회사가 노사 대립 사항에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면서 매년 파업 줄다기리가 연례행사처럼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