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위 대만 TSMC가 공격적인 투자와 선도 기술 도입으로 시장 장악력을 더욱 공고히 할 태세다. TSMC는 120억달러(약 13조4000억원)가 투입되는 미국 애리조나 파운드리 팹(공장)의 착공을 최근 시작했고, 초미세공정인 2㎚(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칩 시범 생산라인을 올해 안에 대만에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TSMC와 점유율 차이가 큰 업계 2위 삼성전자는 미국에 2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했지만, 어느 곳에 이 돈을 쓸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또 TSMC보다 빨리 3㎚ 공정 개발에 성공했으나, 양산 준비는 더디기만 하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TSMC와 삼성전자의 벌어진 점유율 격차는 더욱 좁히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웨이저자(魏哲家) TSMC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있었던 연례 기술설명회에서 "미국 애리조나주 팹 건설은 계획대로 진행 중이고, (해당 팹에서) 5㎚ 반도체를 2024년부터 양산한다"라고 했다.
TSMC는 애리조나에 5㎚ 팹을 포함, 최대 6개의 팹을 지을 예정이다. 이번 120억달러 투자는 이 일환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앞서 지난 4월 TSMC는 앞으로 4년간 총 1000억달러(약 111조5400억원)의 시설 투자 계획을 밝혔는데, 올해에만 300억달러(약 33조4600억원)을 쓴다. 웨이 CEO는 "우리는 고객의 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충분한 제조 역량을 준비할 것"이라고 했다.
TSMC는 올해 안으로 대만에 2㎚ 반도체의 시범 생산라인도 구축한다. 이는 애초 예상했던 것보다 3~4개월 빨라진 것이다. 시범 생산라인은 본격적인 양산 이전에 안정적인 제품 수율(전체 생산품에서 양품이 차지하는 비율)을 확보하기 위한 마지막 연구개발(R&D)로 알려져 있다. 높은 수율이 나오면 양산으로 이어진다. 웨이 CEO는 "올해 말까지 본사가 있는 대만 신주(新竹)에 2㎚ 시범 생산시설을 완공할 계획이다"라며 "차세대 3㎚ 반도체는 내년 하반기 대만 타이난 팹18에서 양산할 것"이라고 했다.
TSMC는 2·3㎚ 공정의 수율이 오르면 지체 없이 양산 할 수 있도록 생산시설을 갖추는 일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웨이 CEO는 "(2㎚ 공정이 가능한) 팹 부지 확보도 진행해 조만간 건설에 착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TSMC는 애리조나 5㎚ 팹 건설이 끝나면 곧바로 3㎚ 팹 건설을 시작한다.
반면, 삼성전자는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에 즈음해 그간 소문만 무성했던 20조원 투자 계획을 확정했을 뿐, 이 투자금이 어디에 사용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함구하고 있다. 미국 새 파운드리 팹은 5㎚ 공정이 유력한 가운데, 3㎚ 팹일 가능성도 점쳐진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미국 투자와 관련해) 구체적인 계획과 입장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했다.
현재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 오스틴과 시설투자를 위한 협상에 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또 TSMC와 인텔의 파운드리 팹을 각각 유치한 애리조나주와 높은 수준의 세제혜택을 협상 중이고, 뉴욕주와도 투자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수십조원이 들어가는 이번 투자는 삼성으로서도 적지 않은 규모다"라며 "세제혜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지방정부 지원책을 면밀히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라고 했다.
미국 쪽 시설투자와는 별개로 TSMC가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는 2·3㎚ 초미세공정 로드맵에서도 삼성전자는 모호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내년 하반기 3㎚ 공정을 적용한 반도체를 만들겠다는 계획과 2㎚ 칩 기술의 개발이 끝난 상태지만, 이와 관련한 시설투자 움직임은 관측되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의 늦은 행보에 TSMC와의 격차가 더 벌어지는 것 아니냐는 게 업계 시각이다.
해외 언론 등도 이런 삼성전자의 느린 전략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삼성전자의 투자규모는 TSMC와 비교해 낮은 수준이다"라며 "삼성전자와 TSMC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업계 관계자는 "TSMC 역시 후발주자인 삼성전자와의 격차를 벌리기 위한 투자 드라이브를 거는 것"이라며 "파운드리에만 집중이 가능한 TSMC와 달리, 삼성전자는 업계 1위인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만큼 집중력이 분산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이런 상황에서 리더십이 부재하다는 점도 삼성전자에는 투자 속도를 내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