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투자를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업계 1위 대만 TSMC를 따라잡으려면 '설계자산(IP)' 확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특히 IP는 파운드리 뿐 아니라 팹리스(반도체 설계기업)와 후공정 등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로 꼽힌다.

31일 삼성전자에 따르면 회사는 2030년까지 파운드리 등 시스템 반도체에 171조원을 투자한다. 이는 기존 투자 계획이었던 133조원에서 38조원을 더 늘려 잡은 것으로, 늘어난 투자금 전액은 파운드리에 투입될 예정이다. 올해 1분기 기준 파운드리 시장 1위 TSMC와 삼성전자의 점유율 격차가 30%포인트 가까이 벌어지면서 대대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삼성전자는 투자금으로 공정 고도화를 위한 설비와 IP 확보에 주력할 예정이다.

TSMC 근로자가 반도체 원판인 웨이퍼를 살펴보고 있다. /TSMC 제공

반도체업계에서는 삼성전자 파운드리가 보유한 IP 숫자가 TSMC보다 현저히 부족해 이 부분부터 빠르게 메워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TSMC는 다양한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방대한 IP를 주무기로 내세우고 있는데, 팹리스와 후공정 등과 어우러지며 시너지를 최대로 내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TSMC가 보유하고 있는 IP는 지난해 기준으로 3만5000~3만7000개인 것으로 파악된다. 서로 다른 종류의 반도체 3만개 이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의미다. 이는 다품종 소량생산이 핵심인 파운드리 사업에 있어 중요한 자산이 된다. TSMC의 IP 라이브러리는 지난 10년간 10배 이상 늘었다. 2019년과 비교해서는 9000개 이상 증가했다. 반면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는 TSMC의 20~30% 수준인 7000~1만개 수준의 IP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재윤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단순한 생산능력 확대가 파운드리 사업 확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라며 "파운드리 사업은 서비스업의 성격도 강하기 때문에 단순하지 않고, 우수한 공정 기술력과 충분한 생산능력 외에 IP 라이브러리 및 전후방 인프라가 고객 확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라인 클린룸. /삼성전자 제공

2024년 파운드리 진출을 선언한 인텔 역시 탄탄한 IP를 기반으로 사업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이미 수십년간 거래를 지속해왔던 수많은 고객사에 중앙처리장치(CPU)나 그래픽처리장치(GPU) 등 자사 핵심 IP를 제공해 파운드리 고객사로 흡수하겠다는 것이다.

팹리스는 반도체를 설계할 때, 자체 IP를 활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ARM이나 시놉시스 등과 같은 제3자(서드파티) IP를 갖다 쓸 때도 있다. 하지만 서드파티 IP는 제품개발에 있어 시간을 더 소비하고, 로열티까지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하다. 이 때문에 팹리스는 반도체 생산을 담당하는 파운드리가 어떤 IP를 보유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게 된다. 시간이나 비용을 서드파티의 것을 사용할 때보다 상당히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IP를 많이 보유한 파운드리를 찾을 수밖에 없고, 이는 TSMC에 팹리스가 몰리는 배경이 됐다.

TSMC는 보유한 IP를 통해 500여곳에 이르는 고객사를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 TSMC를 중심으로 팹리스와 후공정 등 대만 기업들이 견고한 IP 생태계를 형성하면서 시너지를 내고 있다.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경우 IP 이슈가 거의 없는 삼성전자 시스템LSI 물량이 50% 이상이다.

대만 남부과학산업단지에 위치한 12인치 기가팹인 TSMC 18팹. /TSMC 제공

글로벌 팹리스 상위 10개 업체 가운데 미디어텍, 노바텍, 리얼텍 등 3곳이 대만 회사다. 파운드리 또한 TSMC와 UMC 등이 시장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파운드리로부터 웨이퍼를 넘겨 받아 테스트와 패키징 등의 마무리 작업을 하는 OSAT(Outsourced Semiconductor Assembly And Test) 분야의 세계 1위 역시 대만 ASE다. OSAT 분야 상위 10개 업체 중에 대만 기업은 ASE를 포함해 모두 4곳이다.

이 연구원은 "메모리 반도체는 소품종 대량생산, 파운드리는 다품종 소량생산의 특징을 갖는데, 이 때문에 파운드리 사업에서는 메모리 반도체 사업보다 SCM(공급망 관리)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다"라며 "DSP(디자인 서비스 파트너)와 OSAT 등이 대표적인 예로, 이런 외주 업체들과의 협력이 파운드리 사업 경쟁력 강화에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