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대덕특구에 있는 분자진단 전문기업 바이오니아는 ‘최초’가 많다. 국내 최초로 DNA 합성에 성공했고, 국내에서 가장 먼저 유전자증폭(PCR) 장비를 개발했다. 세계 최초 DNA 대량 합성 공장 건설 기록도 갖고 있다. 한국 바이오벤처 1호이면서,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연구소 1호 기업이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생화학을 전공한 박한오 회장은 1992년 바이오니아를 창업했다. 당시 나이는 30세. 지금은 진단키트로 이름을 알렸지만, 이 회사는 유전자 연구에 사용되는 설비와 합성유전자를 국내 기술로 만들겠다는 목표로 세워졌다.
대전 농기구 창고에서 동료연구원들이 모은 종잣돈 8000만원이 시작이었다. 그런 회사가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박 회장은 올해 환갑이 됐다. 바이오니아는 최근 3년간 롤러코스터 같은 시간을 보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진단키트 수출이 늘면서 연매출 360억원(2019년)이었던 회사가 연매출 2237억원(2021년) 규모로 급성장했다.
진단키트 특수가 끝날 무렵이던 지난해 탈모 완화 화장품 ‘코스메르나’로 투자자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코스메르나는 탈모를 일으키는 데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를 ‘짧은 간섭 리보핵산(siRNA, small interfering RNA)’으로 잘라내는 기술을 기반으로 한 화장품이다.
RNA가 가닥이 아주 짧은 형태일 때는 DNA의 유전정보를 전달하는 대신 특정 유전자의 기능을 차단해 암과 같은 질병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 이를 탈모에 적용한 것이다.
바이오니아는 짧은 간섭 리보핵산(siRNA)을 세포 속으로 집어넣는 플랫폼(운반체, SAMiRNA) 기술을 갖고 있다. 코스메르나가 독일 화장품 평가 업체의 안전성 평가를 통과하면서 회사 주가는 급등했다. 지난해 6월 1만7000원이던 주가는 9월 2일 9만8000원으로 뛰어 올랐다. 3년여 전 1500억원대였던 시가총액은 2조원까지 치솟았다. 지난해 연말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가 화장품 품목 허가를 반려하면서 주가가 반토막났지만, 해외 시장에 대한 기대감은 남아있다.
지난 26일 대전 관평동의 바이오니아 글로벌센터에서 박한오(60) 회장을 만났다. 문평동 본사에서 2㎞ 떨어진 글로벌센터는 지난해 중견기업 공장을 사들여 리모델링했다. 연면적 4만3000㎡(약 1만3000평)의 4층 건물 외벽에 연두⋅빨강 알록달록 원색을 입히고 아스팔트 주차장을 정원으로 꾸며 언뜻 보면 놀이터가 연상됐다.
박 회장은 “글로벌 센터 리모델링을 마치고 나서, 관평동 일대가 밝아졌다는 평가를 듣는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지난해 12월 중소벤처기업부 ‘벤처창업진흥’ 포상에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고, ‘공학계 명예의 전당’인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으로 선정됐다. 건물 로비에는 1992년 창업 당시 사용한 DNA 합성 장비가 전시돼 있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ㅡ 로비에 전시된 장비들은 뭔가.
“들어오자마자 있는 건 1992년에 창업 때 썼던 장비다. 미국산인데, DNA를 동시에 2가지 합성할 수 있다. 생명과학연구원에 있을 때 이 장비를 쓰다가 고장이 나면 다 뜯어서 고쳐서 썼는데, 몇 번 하다 보니 ‘내가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ㅡ 1990년대에도 DNA 합성 수요가 있었나.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마무리된 건 2003년 아닌가.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끝난 게 2003년이고, (1990년대) 그때 이미 연구는 시작됐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DNA 합성 수요가 어마어마하게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처음에는 DNA 50개 동시 합성 장치를 개발하겠다고 연구원에 계획서를 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반려당했다. 선배들이 ‘DNA를 그렇게 많이 만들어서 뭘 하려고 그래. 쓸 데도 없는데’라고 했다. ”
ㅡ 그래서 ‘직접 나가서 만들어 보자’라고 생각한 건가.
“연구실에 있으면서 해외 장비를 많이 썼다. 그런데 얼마 쓰지도 않았는데 신제품이 나오고, 거기다 국내 독점 대리점들이 30~40% 마진을 붙여서 원래보다 비싸게 팔았다. 국내에서 최신 유전자 장비를 사려면 현지 가격의 2배였다. 이런 상황에서 똑같은 아이디어로 미국 연구자와 우리가 같이 출발했을 때 게임이 안 된다고 봤다. 그래서 ‘유전자 기술이 앞으로 생명과학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최첨단인데, 이걸 국산화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ㅡ 얼마 만에 개발에 성공했나.
“12번 실패하고 13번째 성공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94개를 합성하는 장비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다 건너뛰고 384개를 한꺼번에 합성할 수 있는 장비 개발에 들어갔다.”
ㅡ 어렵진 않았나.
“처음엔 먹고 살기 바빴다. 그 당시엔 벤처 투자라는 것도 없었으니 흑자를 내는 것에 집중했다. 그렇게 여유 자금이 생기면 연구 개발(R&D)에 쏟아부었고, 그러다 보니 창업하고 나서 (DNA대량 합성을) 2000년에야 완성했다. 그 장비로 2001년 건너편(문평동)에 세계 최대 DNA 합성 공장을 세웠다.”
ㅡ 1990년 당시에도 유전자 연구가 활발했나.
“1984년 KAIST에 입학했는데, 그해 유전공학 진흥법이 만들어졌다. 유전공학 관련 연구비 정부 예산 5000만원 책정됐고, 그중 하나가 DNA 합성 기술 개발이었다. 그 프로젝트에 참여한 게 시작이었다. 이후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 입사해서 같은 연구를 계속했다. 7년 동안 근무를 했는데, 새로운 시도를 하지 말라고 하니, 회사를 나오게 된 거다.”
ㅡ 진단키트로 명성을 날린 일화가 있나.
“지난 2009년 신종플루가 유행할 당시 한번에 150대가 팔려나간 자동화 진단키트가 있다. 대량으로 진단을 해야 하는데, 그 당시만 해도 전문 인력만 검사가 가능했다. 검체 추출을 자동화해서 생명과학 실험을 해 보지 않은 보건소 공무원들도 진단 검사가 가능한 장비를 만들어냈다.”
ㅡ 좀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나.
“서울 보건소와 시립병원에서 진단장비 입찰 소식이 들렸다. 그때 입찰에 참여한 로슈의 장비를 보니 ‘우리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스펙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로슈 장비가 우리와 달리 냉장 기능을 넣은 것을 보고, 일주일 밤을 새워서 장비에 냉장 기능을 탑재했고, 반값에 입찰에 참여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같은 스펙이면 싼 거 쓰지 않겠나. 그 당시 서울시를 넘어 완도의 보건소에서까지 연락이 왔다. 회사 연구원들이 딱 하루 교육하고, 그다음부터 완도 보건소 공무원들이 검사를 했다. 그 당시 매출 150억원에 영업이익 100억원을 냈다.”
박 회장은 자신이 개발한 진단 장비 소개를 부탁하자 20여분을 쉬지 않고 설명했다. 박 회장은 제약 바이오 산업에서 ‘진단’에 대해 쏟는 관심이 더 커져야 한다고 봤다. 박 회장은 “DNA시퀀싱을 하는 미국 기업인 일루미나의 연매출이 1조원인데 이 회사의 영업이익이 80%에 이른다”라며 “이는 일반적인 빅파마(대형제약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높은 수준이다”라고 했다. 박 회장에 따르면 로슈진단 등 글로벌 진단기업들은 플랫폼 장비를 갖고, 거기 들어가는 시약을 팔면서 독점적 지위를 누린다. 박 회장은 “그러니 매출 1조원짜리 회사(일루미나)의 시가총액이 현대차보다 더 큰 그런 상황이 생긴다”라고 했다.
ㅡ 기술 발전으로 이제 누구나 빠르게 분자진단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그 이후엔 어떤 경쟁이 벌어지나.
“그 이후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컴팩트한 스타일의 진단장비를 만들었다. 써모피셔의 킹피셔를 잡으려는 게 목적이었는데, 킹피셔는 크기가 좀 컸다. 책상 두 개를 합친 크기 정도다. 하지만 코로나 검사 수가 밀려드니까 장비를 갖다 놓을 곳이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파트처럼 길쭉하게 만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베트남에서 팔리기 시작했고, 이 장비만 전 세계에서 700억~800억원어치가 팔려나갔다. 중동 남미에서 연간 100억원 이상 매출이 나온다.”
ㅡ 1층 로비에 검은색에 굉장히 투박한 장비도 있었다. 그건 뭔가.
“탄저균 등 생물테러균을 진단할 수 장비다. 한일월드컵을 1년 앞두고 9·11 테러가 일어나자, 청와대에서 월드컵 경기 전에 생물 테러를 검출할 수 있는 장비를 개발해 달라는 요구가 떨어졌다. 연구원들이 공장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먹고 자면서 6개월 만에 개발해 낸 기계다. 탄저균뿐만 아니라 북한이 보유한 12종의 생물무기도 모두 감지할 수 있다. 지금도 이 장비가 국내 유일한 걸로 안다.”
바이오니아는 대전 지역 대학과 연계한 분자진단과 관련한 교육 프로그램도 갖고 있다. 지난 2007년 대전 충남대학교 4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간 PCR 정규 교육 과정을 개설했다. 충남대가 바이오니아의 장비 10대를 구입한 것에서 시작했다.
박 회장은 “충남대에서 우리 실습 장비로 교육을 했고, 이 과정을 마친 학생들은 졸업하면 곧바로 바이오니아에서 진단키트를 개발할 수 있는 역량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이렇게 배출한 인재들이 지금의 한국 진단 키트 개발의 첨병이 됐고, 한국이 PCR 기술 강국이 된 것이 우리 회사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ㅡ 이제 코스메르나 얘기를 좀 묻고 싶다. siRNA를 20여년 전부터 연구한 계기가 있나.
“운이 좋았거나, 내가 머리가 정말 좋았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ㅡ 좀 자세히 설명해 달라.
“1978년에 RNA와 관련한 논문을 본 게 계기가 됐다. DNA에 담긴 유전정보는 메신저 RNA(mRNA)를 통해 리포솜에 전달된다. 우리 몸 속 단백질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합성 DNA를 넣어서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기전을 설명하는 세계 최초의 mRNA논문이었다. 세계 10대 RNA 회사로 꼽히는 아이오니스의 창업주가 이 논문을 썼다. 그걸 보고 ‘우리도 저걸 만들자’라고 생각하게 됐다.”
ㅡ 창업 초기에 DNA합성 공장을 만드는 데 집중하지 않았나.
“다 연결된다. 2000년 초반 튀어나온 기술이 바로 siRNA 기술이었다. 기존의 RNA보다 효율이 백배 천배는 더 좋았다. 이 기술로 지난 2006년 노벨상을 탔다. 그래서 그 메커니즘을 이용한 기술이 앞으로 인류의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플랫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집중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DNA합성 장비를 이용해서, RNA 합성 기술을 개발하고, 대량화하는 작업을 했다. 그게 지금까지 왔다.”
ㅡ SiRNA에 부작용은 없나.
“약물에서 기대하지 않은 결과가 나온 것을 부작용이라고 한다. 원하는 대로 통제 하려면 모든 시스템을 다 알아야 한다. 과거에는 인간 세포가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이해를 못했기 때문에 통제가 안 됐다. 그러니 한약이나 천연물이 통용이 됐다. 그런데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계기로 이제 모든 유전자 코드가 분석이 가능해졌다. 질병의 원인을 알아낼 수 있게 됐고, 그렇다면 잘못된 부분을 고치기만 하면 되게 기술이 발전했다.”
ㅡ 인간의 몸이 기계가 아니지 않나.
“가정을 해 보자는 거다. 인체가 기계라면 몸에 고장 난 부분만 족집게처럼 찍어서 고치면 된다. 기존에 있던 소분자는 고장 난 부분을 4개 정도 인식한다면, SiRNA는 15개 정도 인식을 한다. 인식 능력이 훨씬 크니까 원하는 부분만 공략할 수 있게 되고, 독성도 훨씬 줄어든다.”
ㅡ 그래도 유전자를 건드린다는 것은 위험하게 느껴진다.
“조만간 지구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서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를 다 해독하게 된다. 이 말은 전 세계에 있는 생명체의 소스코드를 모두 해독한다는 뜻이다. 된다. 소스코드만 있으면 모든 기계를 다 설계할 수 있게 된다.”
ㅡ 그런데 그 기술로 어째서 탈모 치료제를 개발하게 된 건가.
“탈모쪽으로 미충족 수요가 크다고 판단했다. 지금 미국 FDA 승인받은 약들은 부작용이 많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독성을 줄인 족집게 같은 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ㅡ 하지만 식약처가 화장품 품목 허가는 반려했다. 의약품으로 허가를 받을 것을 권고한 것으로 안다.
“화장품으로 먼저 출시하고, 효과가 더 높은 의약품 개발을 시도할 계획이다. 한국 식약처는 ‘세계 최초’는 시도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으면 만년 2등밖에 하지 못한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회사는 새로운 것을 시도한 회사들이지 않나. 남들 따라 해서 1등 하는 기업은 없다. 1등 기업이 나오려면 규제 당국도 바뀌어야 한다.”
ㅡ 올해로 창립 30주년이다. 바이오벤처가 30년 영업한 것을 두고 ‘30년 버텼다’라고 표현한다. 비결이 있었나.
“투자를 안 받으면 된다.”
ㅡ 무슨 뜻인가.
“바이오니아를 창업할 때는 벤처캐피털(VC)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동료 연구원들 퇴직금 8000만원을 모아서 창업한 게 이 회사다. 그러니 처음부터 돈 버는 일에 집중했고, 그다음에 번 돈으로 R&D를 했다. 지금 바이오 기업들은 처음부터 투자자들 돈만 갖고 하다보니, 실제 돈을 버는 모델이 아니라 ‘투자를 받을 수 있는 모델’로 투자 받을 생각만 한다. 투자자들도 실제 돈을 버는지 여부보다는 주식시장에서 주가가 오르면 팔고 나오는 식으로 대응한다. 회사는 돈을 못 버는데, 투자자는 돈을 벌고 나오고, 그러면 일반 투자자들은 손해를 보고 곡소리가 난다. 나는 이런 것들이 일반화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기업은 어쨌든 돈을 벌어야 하는 것 아닌가.”
ㅡ 앞으로 10년은 어떻게 계획하고 있나.
“최근 코로나19로 일주일 격리를 하면서 스스로 질문을 던져봤다. 맨땅에서 이 회사를 창업한 지 30년이 됐고, 이제 환갑도 넘었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일 할 수 있을까. 앞으로 더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10년 정도일 텐데 무엇을 할까. 분자진단 기술은 이미 이뤘고, SiRNA로 차세대 의약품 플랫폼은 완성했으니, 이제 매출을 올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독자적 기술을 구축했으니, 고객들에게 팔아야 완성이 되지 않겠나. 그래서 매출 넘버원 회사를 만들어보겠다는 목표를 정했다.”
ㅡ 매출 1등은 어떻게 이룰 생각인가.
“우리가 전 세계에서 제일 잘할 수 있는 걸 하자고 해서 30년 전에 시작한 게 PCR과 DNA 합성 기술이다. 이미 이 분야로는 우리가 1등을 할 수 있고, 해 냈다. 그 다음이 siRNA 치료제다. 항체 치료제 그 다음으로 현재 주목 받는 분야가 바로 RNA인데, 20여 년 전부터 내가 집중 연구해 온 분야가 차세대 헬스케어의 주력이 된다. 흥분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