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서울 성북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국제협력관 컨벤션홀에서 정기택 홍릉강소특구 창업학교 교장이 교육을 진행 중이다. /홍릉강소특구 제공

"기업을 처음 시작하시는 분들은, 본인이 이 사업 아이템을 왜 골랐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와 비전을 반드시 갖고 계셔야만 합니다."

지난 14일 서울 성북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국제협력관 컨벤션홀에서 김용건 블루포인트파트너스 부대표이사가 한 말이다. 김 이사는 이날 '홍릉 강소연구개발특구(홍릉강소특구)'의 GRaND-K 창업학교에서 진행하는 교육에 강사 자격으로 연단에 섰다. 강연을 들으려 모인 100여명의 창업자들이 넓은 강당을 가득 채웠다.

홍릉강소특구는 서울 동대문구 홍릉에 있는 KIST, 고려대학교, 경희대학교, 서울바이오허브 등이 파트너십을 맺고 지난 2020년 7월 출범한 메디클러스터(의료기술산업집적단지)다. 특구에 입주한 스타트업은 현재 200곳이 넘으며, 한국콜마와 대웅제약 등 제약사가 스타트업을 도울 앵커 기업으로 들어와 있다. 특구 지원을 위해 5년간 정부 예산 216억원이 투입된다.

GRaND-K 창업학교는 홍릉강소특구가 지난 4월부터 운영을 시작한 창업 교육 프로그램이다. 서류전형을 통과한 창업팀들은 6주간 공통교육을 받은 뒤, 투자기관 멘토링과 각종 경진대회를 거친다. 특구는 경진대회에서 입상한 20개 팀에게 총 1억5000만원의 사업비를 지원할 예정이다.

이날 오후 2시 30분부터 1시간 30분간 진행될 예정이었던 김 이사 교육은 종료 예정 시간인 오후 4시를 넘어서까지 계속 이어졌다. 창업자들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김 이사는 4시 20분쯤 돼서야 강의를 마쳤다. 이후에도 그의 명함을 받고 조언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는 창업자들이 길게 줄을 선 탓에, 김 이사는 오후 4시 30분이 넘어서야 강당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김 이사는 "창업자들이 이 정도로 뜨거운 열의를 보여줄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기술과 역량이 좋아도 기업을 만들고 꾸려나가는 노하우가 없어 힘들어하는 초기 창업자들에게 도움이 된 것 같아 보람을 느낀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가 소속된 블루포인트파트너스는 홍릉강소특구에 입점한 기업들과 GRaND-K 창업학교 소속 예비 창업자들에게 투자할 5억원 규모 펀드를 조성 중이다.

지난 14일 서울 성북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국제협력관 컨벤션홀에서 김용건 블루포인트파트너스 부대표이사가 교육을 진행 중이다. /최정석 기자

이날 만난 창업자들은 홍릉강소특구 교육 커리큘럼에 크게 만족했다. 30대 예비창업자 이모씨는 "사업 구상 초기에는 단순히 1인 가구의 가성비 식단을 짜는 데 도움을 주는 서비스를 구상했다"며 "그런데 창업학교 교육 이후엔 AI 기술을 접목, 식단 조절이 필요한 만성질환 고객의 건강 식단을 짜주는 서비스로 방향을 틀었다"고 말했다.

지창대 리브라이블리 대표는 "원래는 회사 차원에서 운동 강사를 교육해 노인 복지관 등에 파견하는 서비스로 시작했다"며 "창업학교 교육을 받은 뒤엔 사업 목표를 단순 운동이 아닌 '근감소증 예방 및 치료'로 좁히게 됐다"고 말했다. 지 대표는 "홍릉특구 교육 덕분에 사업 모델의 윤곽이 뚜렷해지고 타깃 고객층도 확실해지면서 자신감이 커졌다"고 말했다.

앞으로 벤처캐피털(VC)·액셀러레이터(AC) 등이 참여하는 투자기관 멘토링 프로그램에 대한 기대감도 컸다. 이날 교육에 참여한 조성진 큐어버스 대표는 "현직에 있는 VC, AC를 직접 만나 사업에 대한 조언을 듣고 투자 유치도 가능하다는 게 홍릉강소특구의 핵심이라고 본다"며 "이만한 프로그램은 여태껏 국내에 없었다"고 말했다.

홍릉강소특구 측은 이러한 시스템을 마련하기 위해 현재까지 20여개 VC·AC를 섭외했다. 더웰스인베스트먼트, 인포뱅크, 삼호그린투자, 아주IB투자 등 국내 유력 투자사들과 더불어 이스라엘 요즈마그룹 등 다양한 회사들이 홍릉강소특구를 지원하기 위해 나섰다.

GRaND-K 창업학교 교장인 정기택 경희대 경영학부 교수는 지난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홍릉강소특구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다고 한다. 윤석진 KIST 원장(2016년 당시 부원장), 이관영 고려대 연구부총장도 정 교장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국내에서 바이오·헬스 클러스터가 성공하려면 어떤 형태를 갖춰야 할지 고민했다.

이들이 계획한 것은 '경제 기반형 도시재생 뉴딜 사업'이다. 단순히 스타트업이 들어설 사무실 자리만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클러스터가 하나의 도시처럼 작동할 수 있도록 주거 환경까지 마련해 지역 전체를 살리자는 취지다. 여기에 산업·대학·연구소는 물론 병원까지 가까운 거리에 모여있어 바이오·헬스 기술 혁신에 최적화된 장소를 물색했다.

그렇게 경희대·고려대와 각 대학 병원, KIST까지 모여있는 홍릉에 클러스터를 만들자는 국책과제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제안, 2020년 8월 홍릉강소특구가 출범했다. 현재 도시재생 뉴딜 사업 일환으로 서울주택도시공사(SH)가 홍릉 지역에 주거 단지 건설을 확정지은 상태다. 관련 인프라 건설 비용으로 국비 2000억원이 지원된다. 국내 스타트업 인력과 연구원, 해외 과학자 등이 이곳에 거주할 계획이다.

홍릉강소특구가 출범 후 3년째를 맞이하면서 입점한 기업 중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는 곳이 등장하고 있다. 표적항암제 특화 제약사인 '시프트바이오'는 최근 100억원을 투자받은 데 이어 미국 제약사 루터스바이오와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원격의료회사인 '하이케어넷'은 미국 노인대상 의료보험 사업인 메디케어 시범운용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 홍릉강소특구는 경희대·고려대 공동학위 과정으로 '첨단 기술 비즈니스 학과'를 만들어 석박사 200여명을 양성하는 사업을 수주한 상태다. 정 교장은 이를 비롯한 다양한 사업을 통해 홍릉강소특구가 인력 양성, 산업 진흥, 일자리 창출까지 되는 '종합 클러스터'로 성장하길 꿈꾸고 있다. 이날 경희대학교에서 정기택 교장을 만나 GRaND-K 창업학교를 만들게 된 계기와 앞으로의 계획 등을 들었다.

지난 14일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경희대학교 사무실에서 만난 정기택 교장. /최정석 기자

一 홍릉강소특구는 기획 단계부터 거대한 프로젝트였을 것 같은데, 어떻게 이를 구상하게 됐나.

"시작은 2003년부터 시작된 '홍릉 포럼'이란 이름의 모임이라고 볼 수 있다. 경희대, 고려대 등 홍릉에 있는 17개 대학에 국책기관 장들이 1년에 한두 번씩 모여 국가적 이슈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그러다 보니 서로 사이가 돈독해지는 건 좋았는데 실질적으로 뭔가 새로운 걸 만들거나 하는 건 없다는 느낌이 조금씩 들었다. 그런 와중에 포럼에 참여한 사람들 사이에서 유의미한 국책과제를 만들어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그게 홍릉강소특구의 시작이다."

一 산업 클러스터도 형태가 여러 가지 있을 텐데, 홍릉강소특구만의 콘셉트는 어떤 거였나.

"모든 클러스터는 기본적으로 스타트업 등 기업이 입점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여기에 대학 쪽 인프라와 연구진 등을 투입해 '산·학·연' 시스템을 구축한다. 홍릉 특구는 여기에 '병원'과 '주거'를 더했다. 바이오·헬스 산업에서 병원은 임상 등 분야에서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한다. 또 특구 주변에 주거단지를 건설해 입점한 기업 직원들은 물론 지방과 해외에서 올라온 연구원들이 집을 못 찾아서 떠돌다가 결국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일을 막고자 했다. 산·학·연·병(병원)에 주거 기능까지 갖춘 도시형 클러스터를 생각한 결과가 홍릉강소특구다. 현재 SH가 주거단지 건설을 확정지은 상태다."

一 홍릉강소특구를 바이오·헬스 클러스터로 만들자고 정한 이유가 있나.

"국내 교육 특성상 바이오·헬스 쪽에 인재풀이 쌓이면서 산업적으로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봤다. 바이오·헬스 산업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의료 산업'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제일 똑똑한 학생들이 어떤 공식처럼 의대로 진학하기 시작한 게 20년이 좀 넘었다. 과거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것도 한국에서 가장 똑똑한 인재들인데, 지금은 그들이 의료 쪽으로 가고 있으니 의료 산업만큼 성장 가능성이 큰 분야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一 그런 것 치고는 바이오·헬스 산업이 주목받은 시기가 좀 늦은 것 같은데.

"전교 1등은 의대에 간다는 일종의 공식이 생기고 이제 시간이 좀 됐다. 그동안 현장에서 경험과 지식을 쌓은 이들이 산업 쪽에서 조금씩 두각을 나타낼 타이밍이 왔다. 의사가 바이오·헬스 기업을 창업하는 일이 최근 들어 눈에 띄게 늘어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다른 측면에서는 한때 의료 민영화, 황우석 사태 등으로 이쪽 산업 이미지 자체가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면서 정부 차원의 지원 등 추진력이 늦게 붙은 부분이 있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아쉽다고 생각한다."

一 창업학교 교장의 시선으로 봤을 때 최근 바이오·헬스 산업 중 앞으로 새롭게 부상할 분야가 뭐라고 보나.

"슬립테크라고 생각한다. 지난 2015년과 올해 초까지 해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하는 소비자가전쇼(CES) 행사를 지금껏 2번 가봤다. CES 전시회장 본관의 주요 테마가 앞으로 3~5년 바이오·헬스 산업의 판도라는 게 업계 중론이다. 2015년에 갔을 땐 웨어러블 헬스케어 기기가 대부분이었다면, 이번에는 슬립테크 쪽 제품이 정말 많았다. '슬립 넘버'라는 미국 스마트 침대 회사는 아예 메인 전시장 안에서도 한가운데 있었다. 홍릉 특구에 입점한 기업 중에도 슬립 테크 쪽 스타트업이 몇 있다. 대세가 슬립 테크인 만큼 이들이 잘 해줬으면 좋겠다.

지난 14일 서울시 성북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국제협력관 컨벤션홀에서 최치호 홍릉강소특구 단장이 교육을 진행 중이다. /홍릉강소특구 제공

一 홍릉강소특구 입점 기업을 보면 제약보단 디지털 의료기기 쪽이 더 많은 것 같다.

"전략적으로 좋은 흐름이라 본다. 아무것도 없는 제로베이스 상태에서 신약 하나를 만들어 출시하려면 정말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 정부가 바이오·헬스 산업 지원을 위해 쟁여놓은 예산에 국내 상위 20개 제약·바이오 기업이 연구개발(R&D)에 쓰는 돈을 다 합쳐도, 화이자 한 곳에서 신약 개발에 쓰는 돈보다 적다. 그렇다고 정부에 앞으로 제약 산업을 키워야 하니 10조~20조원씩 돈을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디지털 의료기기 쪽이 더 많은 건 냉정한 선택과 집중의 결과라고 본다. 디지털 의료기기라면 한국이 이른 시간 안에 전 세계 넘버 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홍릉 특구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一 인력 양성도 필요하지 않나.

"좋은 질문이다. 현재 홍릉강소특구가 '첨단 기술 비즈니스 학과'라는 석박사 과정 인력 양성 사업을 수주한 상태다. 경희대와 고려대에서 함께 진행하는 공동학위 과정이고, 6년간 79억원을 지원받는다. 210명 정도 학생을 뽑아 가르칠 계획인데, 800만원 수준인 1년 학비를 모두 지원해준다. 전례 없는 초대형 인력 양성 사업이라 보면 된다."

一 홍릉강소특구의 미래상은 무엇인가.

"인력 양성, 산업 진흥, 일자리 창출 등 산업과 기술과 인력을 모두 성장시키는 종합 클러스터로 거듭날 수 있도록 특구를 키우는 게 내가 그리는 미래상이다. 사람을 키워서 기술을 만들고, 연구시설과 병원 등을 통해 이를 더 발전시키면, 특구가 섭외한 VC·AC가 여기에 돈을 대는 선순환 구조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국내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에서 유니콘 기업, 데카콘 기업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