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바이오사이언스의 최대주주인 최창원(59) SK디스커버리 부회장이 최근 싱가포르에 있는 비영리 백신 기업 힐러먼연구소를 방문한 사실이 이 기업 공식 소셜미디어(SNS) 계정으로 알려졌다. 최태원 회장의 사촌 동생인 최 부회장은 1994년 선경인더스트리(현 SK케미칼)에 과장으로 입사해 28년째 SK에서 일하고 있지만 언론 인터뷰가 거의 없어서 '은둔의 경영자'로 통한다.
그런 최 부회장의 사진이 해외 연구소 SNS에 공개된 것이다. 힐러먼 측은 공식 계정에 올리기 전에 SK그룹 측과 사전 협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알려졌다.
21일 비영리 글로벌 백신기업인 힐러먼연구소에 따르면 최근 회사 공식 SNS(링크드인) 계정에 최창원 부회장의 회사 방문 사진이 올라왔다. 연구소는 "SK바이오사이언스는 싱가포르 시설에서 연구하는 초기 연구개발(R&D)을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파트너다"라고 소개하며 "양사 협력을 논의할 좋은 기회였다"고 평가했다.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힐러먼연구소는 글로벌 제약사인 MSD와 자선재단인 웰컴트러스트가 합작 투자한 인도계 백신 회사다. 감염병 위험에 노출된 중저소득국(LMIC) 지원을 위한 로타바이러스, 콜레라 등 감염병 백신과 치료제를 주로 개발해 왔다.
최 부회장의 싱가포르 방문은 글로벌 백신 시장 개척에 방점이 찍힌 것으로 보인다. 힐러먼은 싱가포르경제개발위원회(EDB)의 지원을 받아, 싱가포르 백신 제조 허브 사업에 나섰고, 이 지역에는 바이오 연구개발(R&D) 관련 정부 기관, 연구소를 비롯해 노바티스 등 400여 개 글로벌 제약사가 입주해 있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국산 코로나19 백신 개발 막바지에 왔지만 엔데믹(풍토병화)에 가까워 오면서 백신 수요는 감소하는 추세다. 여기에 전 세계 백신 공급 유통망은 이미 글로벌 제약사가 지배하고 있는 상태다.
의료계 관계자는 "SK바이오사이언스는 GSK, 화이자, 사노피, 머크가 쥐고 있는 글로벌 백신 시장 구조에서 이른바 '틈새시장'을 뚫자는 전략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며 "새로운 시장을 뚫어 나가려면 대학과 연구기관과의 협업을 통한 글로벌 파트너십이 필수라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신은 국가 정책과 맞물려 있어서, 글로벌 시장에 카르텔이 존재한다. 단순히 자본이나 제품 경쟁력으로 뚫기 어려운 시장이라는 것이다. 최 회장은 지난해 1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감염병대응혁신연합(CEPI)과 안동공장 '시설사용계약' 연장 체결식에도 안재용 SK바이오사이언스 사장과 동행했다.
하지만 최 회장의 '백신' 공개 행보는 지난해부터 부쩍 늘었다. 지난해 11월 안철수 대통령직인수위원장(당시 국민의당 대선 후보)이 SK바이오사이언스 안동공장을 방문했을 때 직접 맞이했고, 지난해 12월 열린 SK바이오사이언스와 인천시의 인천 송도 본사 이전 계약식에도 직접 참석했다. 지난해 1월 초 문재인 대통령이 안동공장 찾았을 때는 최 부회장이 아닌 최태원 SK회장이 맞았다. 최 회장은 비슷한 시기에 고대의료원과 감염병 산학협력을 맺을 때는 협약식을 직접 찾았다.
이런 공개 행보를 두고 재계에서는 최 부회장이 SK그룹에서 벗어난 본격적인 독자 경영에 돌입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고(故) 최종건 회장이 창업한 SK는 그의 동생인 고(故) 최종현 회장이 이어받았으며, 현재는 최종현 회장의 장남인 최태원(63) 회장이 SK그룹을 총괄하고 있다.
최종건 창업회장의 장남인 최윤원 전 SK케미칼 사장은 2000년 지병으로 별세했고, 차남인 최신원 전 SK네트웍스 회장은 횡령 배임 혐의로 모든 직책에서 물러난 상태다. 최창원 부회장은 최 창업회장의 3남으로 SK디스커버리 경영만 맡고 있다.
SK디스커버리는 SK그룹 계열사지만 최 부회장이 지분 40.18%를 보유한 독립 지주사다. SK케미칼(옛 선경인더스트리)에 발판을 둔 최 부회장은 지난 2019년 SK건설 지분을 전부 팔면서 SK디스커버리를 중심으로 한 독립 경영을 시작했다.
최 부회장은 그로부터 2년 만인 지난해부터 본격적인 지배구조 개편에 나섰다. 지난해 연말 SK디스커버리 손자 회사이던 SK디앤디를 자회사로 편입하면서, SK케미칼과 SK가스, SK플라즈마, SK디앤디를 자회사로 두게 됐다. SK디스커버리는 SK케미칼과 SK플라즈마 등 자회사 지분을 확대하면서 최 부회장의 경영권을 강화하고 있다. 최 부회장은 지난해 연말 열린 SK그룹 CEO세미나에도 강연을 맡아 조리 있는 언변으로 두각을 드러냈다고 한다.
SK그룹과 SK디스커버리 모두 제약·바이오 사업을 하고 있어 언뜻 보면 겹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분야가 다르다. SK그룹 계열사인 SK바이오팜·SK바이오텍·SK팜테코가 신약 개발을 주력으로 한다면, SK디스커버리가 보유한 SK바이오사이언스는 혈액제제, 백신 등을 주력으로 한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계열 분리가 임박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최 부회장은 현재의 SK바이오사이언스를 만들어 낸 사람으로 통한다. 지난 2006년 대규모 백신 투자 계획을 세우고 2012년 안동에 세계 최고 수준의 백신공장(L하우스)을 지었다. 10여년 전 신종플루 때도 최 부회장이 이끄는 SK케미칼이 백신 생산에 깊이 관여했다.
SK그룹에 정통한 관계자는 "최 부회장이 SK케미칼을 중심으로 입지를 다지고 있었던 만큼 10여년 전 SK바이오사이언스를 일으켰을 때 충분히 그룹 내에서도 영향력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며 "그 성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힐러먼연구소의 게시글에는 모더나코리아의 의학담당 김희수 부사장이 '축하한다'는 댓글을 남겼다. 김 부사장은 사노피 출신이다. 백신 원부자재 기업인 사이티바의 크리슈나 수만트 사이티바 아세안 헤드, 대만계 백신 대기업인 메디겐 바이오로직스 리시셴(李思賢) 부사장도 '좋아요'를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