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삼성병원 신영철 정신의학과 교수. /강북삼성병원 제공

넥슨의 창업주인 고(故) 김정주 NXC 이사가 별세한지 벌써 한 달여가 지났다. 갑작스러운 비보로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 했는데, 고인이 우울증을 앓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정신 건강과 관리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신영철 교수는 한국 사회는 특유의 ‘체면의 문화’ 때문에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을수록 좌절을 겪었을 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더 큰 충격을 받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신 교수는 “평상시에 문제가 없더라도, 만약의 경우 (심리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네트워크는 쌓아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성공한 CEO들은 가족 관계가 매끄럽지 않은 경우가 많다”며 “회사 생활에 몰두하다 보니, 가족도 부하 직원을 다루듯 대한다”고 했다. 하지만 신 교수는 “(조울증이나 우울증 같은) 기분 장애는 통제 가능한 범위에서는 사업가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성공한 사람 가운데 넓은 의미의 ‘기분 장애(우울증이나 조울증)’를 가진 경우가 많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존 F 케네디가 대표적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식사 시간 빼고는 쉴 새 없이 말하는 다변(多辯)으로 유명했고, 케네디 대통령은 한 자리에 앉아있지 않고 계속 움직여서 백악관 의자를 두 개나 망가뜨렸다. 두 사람은 정상의 범주를 넘어서는 ‘기분 고조형’ 성격을 보였지만, 오히려 이런 장애 덕분에 대공황과 쿠바 미사일 위기를 돌파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신 교수는 2013년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를 개설하고, 조직문화와 직장인의 마음 건강 등을 연구했다. 경북대 의대를 졸업한 신 교수는 고려대 의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이후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서 연구위원을 지냈다. 신 교수는 얼마 전에는 10여년간 도박 중독 환자에 관해 진료하고, 연구한 결과를 담은 <어쩌다 도박>을 펴냈다.

신 교수를 지난 7일 강북삼성병원에서 만났다. 한국은 2000년대부터 대기업에 직원 심리상담센터를 만들기 시작했고, 2010년대 대부분 대기업으로 확산됐다. 그는 “공공기관이나 구청에도 관련 상담조직이 도입되고 있다”며 “단순히 직원 건강 관리를 넘어 헬스케어 사업 차원에서 네이버는 신경정신과 전문의에 도움을 받고, 에이스 침대와 같은 기업에서는 심리학자를 고용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一 넥슨 김정주 이사가 생전에 우울증을 앓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성공한 기업인의 정신 건강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김정주 이사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젊은 시절 성공한 사람 중에는 실패의 경험이 없는 경우가 있다. 실패의 경험이 없으면 좌절이 왔을 때 맷집이 약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사회적인 좌절 때문에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 많다. 예를 들어 사기 사건에 연루돼 큰 손해를 봤다고 해도 밝히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는다.”

ㅡ 하지만 좌절이나 실패를 겪었다고 모두가 우울증에 걸리는 건 아니지 않나.

“좌절했다고 모두 우울증을 겪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한국식 체면 문화 때문에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좌절을 겪었을 때 상의할 사람이 없어서 문제가 커지고는 한다. 체면이 깎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좌절이 드러나는 자체에 두려움을 갖는다. 이런 좌절이 드러났을 때 인생이 무너진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一 좌절을 극복하지 못해서 극단적 선택까지 간다는 건가.

“예상치 못한 좌절을 겪으면 자신이 살아온 인생 전체가 실패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대표적인 것이 이혼이다. 30년 정도 결혼 생활을 하고, 황혼 이혼을 하게 되면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30년의 결혼 생활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데, 결혼한 자체부터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혼은 이혼이고 인생은 인생이다.”

一 우울증도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봐야 하나.

“스트레스는 우울증을 드러나게 하는 촉발인자다. 적응장애 우울증은 스트레스로 오기도 하지만, 주요 우울증은 그렇지 않다. 생물학적인 우울증은 스트레스와 무관하다. 생물학적 기질과 환경적 요인이 결합하면서 증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환경이 좋으면 드러나지 않았을 우울증 증상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타날 수 있다.”

一 생물학적으로 우울증이나 조울증이 있는데, 자신은 모를 수도 있나

“사업적으로 성공한 사람 가운데 넓은 의미의 기분 장애를 가진 경우가 있다. 일반적으로 이런 기분 장애는 사업적으로는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에너지가 약간 과한 듯 넘치는 것은 사회적 활동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이클이 있을 수 있다. 우울한 상태에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하면서 리듬이 깨지면 병증이 악화될 수 있다.”

一 우울증도 유형이 많은가.

“수도 없이 많다. 스트레스로 생긴 적응장애 우울증도 있고, 기분이 널뛰는 조울증도 있다. 약만 먹어도 되는 생물학적 우울증도 있다. 조울증의 우울기와 우울증은 증상이 같지만 치료법은 정반대다. 우울증은 항우울제를 처방하지만, 조울증은 기분조절제 항불안제 등을 처방해야 한다. 적응장애 우울증은 환경이 좋아져야 해결된다. 한 가지로 설명이 어렵다.”

김정주 NXC 이사가 2016년 열린 넥슨컴퓨터박물관 워크숍에서 바람의나라 과정을 설명하는 모습. /넥슨컴퓨터박물관 유튜브 캡처

一 CEO들 심리 상담도 많이 하신 것으로 안다. 어떤 내용을 주로 상담하시나.

“국내 CEO들은 리더십 교육을 많이 받는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멘탈 코칭도 필요하다고 본다. 대부분의 50~60대 임원들은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상담을 해 보면 가장 먼저 수면이나 음주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그 나이가 되면 대개 수면무호흡증도 오고 집중력도 떨어진다. 이후 직원 관리, 회사 경영 문제에서 가족 문제로 넘어간다. 그런데 대개의 CEO들은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호소한다.”

一 가족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게 어떤 뜻인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좋은 경우를 보기 힘들다. 훌륭한 아버지 밑에서 힘들어 하는 아들들이 많다. 집에 가서도 자기 부하 대하듯 가족을 지적하는 CEO들이 많다.“

一 큰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이 가족 간 문제로 우울증을 겪을 수도 있나.

“가족과 직장 생활이 다 연결돼 있다. 한 CEO가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 있는 20대 후반 아들에 대해 상담한 적이 있다. 집에만 있는 아들을 보면 ‘왜 저렇게 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CEO가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내가 너무 성취 지향적으로 달려왔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후 회사 생활에도 여유를 갖고, 아들도 부드럽게 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태도가 달라지니, 아들이 문자 메시지로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 CEO는 한참을 고민한 후에 ‘응원하겠다’고 답했고, 이후부터 아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경성 질환이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좋아질 수도 있다.”

一 하지만 아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아버지는 비단 기업 CEO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기업인 중에 부하들과도 경쟁을 하는 사람도 있다. 어릴 때부터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승부를 반복하다 보니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 놓고도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뭐든지 자신이 제일 잘해야 하는 자세는 관계를 틀어지게 한다. 하지만 이런 심리의 기저에는 두려움과 열등감 있다. 은퇴한 이후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가 대표적이다.”

一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심리적 어려움이 생겼을 때 네트워크를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 힘들 때 도움받을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안이 된다.”

一 그렇다면 일반 직장인의 정신건강을 해치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인가.

“직장인 스트레스의 90%는 인간 관계에서 온다. 회사 보고 들어와서 상사 보고 나간다는 말도 있지 않나. 자신을 괴롭히는 직장 동료가 바뀔 것 같지 않으면 괴로워진다. 물론 동료, 후배 스트레스도 있다. 회사가 군대식 조직 문화를 갖고 있어서, 인력은 충분히 주지 않으면서 성과를 낼 것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 10을 주고 200의 성과를 요구하면 당사자는 좌절하게 된다. 요즘에는 이 회사를 다니면서 내가 성장할 수 있는지를 보는 경우도 늘었다. 그 다음에는 워라벨(일과 삶의 균형)을 고민한다.”

一 직장에서 인간관계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수용할 부분과 수용하지 못할 것을 알려줘야 한다. 예를 들어 상사와 갈등이 있다고 보자. 이것이 상사의 문제인가, 나의 문제인가, 아니면 관계의 문제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상사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다른 조직원들과 대화를 나눠봐야 한다. 다른 조직원도 힘들어 하는 것이 확인되면, 더 윗선에 보고할 수 있고 상사가 상처받지 않는 범위에서 대화로 풀어갈 수도 있다.”

一 상사가 잘못한 게 확인됐는데, 상사의 기분까지 챙겨야 하나.

“한국은 ‘체면의 문화’가 있다고 했다. (그러니 잘못했다가는 사고가 날 수 있다.) 상대방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소셜 스킬이 필요하다. 그리고 의외로 나의 문제일 수도 있다. 가는 곳마다 상사와 트러블이 생긴다면 내 문제일 수도 있다.”

一 내 문제라고 파악되면 어떻게 조언하나.

“쿨하게 수용하고 그 회사에서 퇴직할 수 있도록 결단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월급 때문에 회사를 계속 다니고 싶다고 하면 문제가 되는 사람과는 거리를 두고 회사를 다니라고 한다. 증상이 심하면 약을 처방할 수도 있다.”

一 항우울제, 향정신성의약품은 어디까지 발전했나.

“부작용을 개선한 향정신성 의약품이 개발된 것이 1990년대다.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 획기적인 신약은 나오지 않고 있다. 뇌 연구가 많이 됐지만, 인류가 아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이다. 우울증도 생물학적 메커니즘이 완벽히 밝혀지지 않았다. 우울증을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으로 생기는 것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정신과적 문제는 사람마다 다 달라서, 이 메커니즘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一 생물학적 메커니즘만으로 설명이 안 된다는 건 무슨 뜻인가.

“예를 들어 가정내 폭력으로 우울증이 왔다면, 항우울제를 처방해 치료한다고 해도 그 원인이 되는 가정폭력이 계속 되면 낫지 못한다. 환자를 가정폭력에서 분리하는 등의 외부 환경을 조절해야 병이 낫는다는 것이다. 정신과 치료는 약만 쓰고 상담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환경도 바꿔주는) 통합 모델로 가야 한다.”

一 그나저나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이어지면서 우울증 환자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들었다. 실제로 그런가.

“최근 고령층 환자들이 신경성 질환으로 병원을 많이 찾는다. 코로나19로 고령층에 대한 사회적인 기능을 할 장소가 사라졌다. 노인대학, 문화센터, 수영장이 문을 닫으면서 갈 곳이 없어졌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을 만나고 자극을 받아야 하는데, 이런 장소가 문을 닫으면서 아무런 자극이 없어졌다. 일상의 리듬이 깨지면서 한동안 병원에 오지 않았던 신경성 환자들이 다시 병원을 많이 찾는다.”

一 코로나로 20~30대도 좌절을 많이 느낀다고 들었다.

“코로나와 같은 재난은 내가 노력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노력으로 상황을 바꿀 수 있으면 큰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좌절과 분노가 나타난다.”

一 이런 좌절감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내가 해결 할 수 있는 일은 해결하고,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쿨하게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쓸데없는 고민을 뭐하러 사서 하나.”

신 교수는 ‘쓸데없는 고민’의 예로 결벽증에 걸려서 내원한 고등학교 3학년 환자를 들었다. 이 환자는 손에 병균이 있다고 하루 종일 손만 씻었다고 한다. 신 교수는 “그 학생의 진짜 문제는 손에 있는 병균이 아니라, 자기가 진짜 고민해야 하는 것을 피하려는 게 문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눈 앞에 닥친 자신의 할 일, 대학 입시를 직시하도록 유도해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설명했다. 신 교수는 하루에 10시간씩 게임을 하던 게임 중독 환자를 예로 들었다. “게임을 하는 10시간을 줄이는 게 아니라, 게임을 하지 않는 14시간을 잘 살게 만들어줘야 한다. 중독이나 우울증의 치료는 환자가 자신의 인생에서 진짜 고민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관심을 갖게 해 주는 것이 시작이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갖고 끙끙대는 직장인들에게 신 교수는 ‘쿨하게’ 말했다. 걱정한다고 걱정이 없어지지 않으니, 걱정은 그만 접고 재빨리 현실에 돌아오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