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병원 임상유전체의학과 채종희 교수가 지난달 23일 조선비즈와 인터뷰 하고 있다. 채 교수는 현재 서울대병원 희귀질환센터장, 정밀의료센터장을 역임하고 있다. /전효진 기자

“엄마 아빠 잘못 없어요. 최대한 할 줄 아는 게 많은 아이로 키워봅시다.”

6년 전, 서울대병원 어린이병동에 환아 없이 한 보호자가 간식을 들고 찾아왔다. 아이는 소아 희귀질환 국내 최고 권위자인 채종희 교수로부터 ‘듀센형 근이영양증’ 진단을 받고 1년에 2번씩 꾸준히 진료를 받아왔는데, 몇개월간 소식이 없더니 결국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채 교수가 진단을 내릴 때 했던 약속을 더는 지킬 수 없게 된 것이다.

전 세계 8000여개 희귀질환 중 현대의학으로 치료할 수 있는 병은 5%에 불과하다. 완치보다는 관리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치료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괴로웠던 채 교수에게 보호자는 예상 밖의 말을 했다. “자식한테만큼은 미안한 마음은 없게 해주셨어요. 저희 자식을 최고 의료진과 함께 최선을 다 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날 이후 채 교수는 같은 일로 고통받는 사람이 없도록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희귀질환 특성상 비슷한 사례와 정보를 구하는 게 어려운데, 흩어져 있는 데이터를 한 곳에 모아 놓은 AI기반 연구 플랫폼이 있다면 환자, 보호자, 의료진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연구로 희귀질환 분야에서 최근 많은 것이 변화하고 있다. 희귀질환은 발병 후에는 손상된 장기를 되돌릴 수 없어 증상이 나타나기 전 조기진단을 하고 이에 맞는 조치를 받는 게 중요하다. 채 교수가 있는 서울대연구팀은 지난 2020년 최소한의 피를 뽑아 유전성 질환 250여종을 일주일 안에 진단할 수 있는 검사법을 개발했다. 덕분에 신생아 집중치료실이나 중환자실 환아에게도 사용 할 수 있게 됐다.

병원의 진료시스템도 보다 ‘스마트’해졌다. 희귀질환의 80%는 유전자 돌연변이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데 환자뿐 아니라 ‘유전자’로 묶인 가족의 삶의 질까지 고려한 총체적 관리를 하도록 바뀌었다. 이 시도는 지난해 5월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유족이 소아암·희귀질환 어린이를 위해 써달라며 서울대병원에 3000억원을 기부하면서 속도가 빨라졌다. 어린이병원 기부 역사상 가장 많은 액수다. 서울대병원은 같은 해 정밀의료센터와 희귀질환센터를 통합해 국내 최초로 임상유전체의학과를 출범했다. 삼성의 기부금 중 1500억원은 소아암, 600억원은 희귀질환, 나머지 어린이병에 900억원이 사용될 예정이다.

희귀질환 분야 명의로 꼽히는 서울대병원 채종희 희귀질환센터장(교수)을 지난달 23일 오전 임상유전체의학과에서 만났다. 일반적으로 소아과 진료실에는 10가지 이내 질병을 가진 환자가 오는데, 이날 채 교수에게는 60가지 이상의 질병을 가진 각기 다른 환자 90여명이 대기 중이었다.

임상유전체의학과 진료실 내부는 타 진료과와 비교해 최대 3배 정도 넓었고 컴퓨터 모니터가 10대 이상 있었다. 한 진료실에 내과, 소아청소년과, 신경과, 진단검사의학과 등 여러 학과 교수가 동시에 들어와 통합 진료를 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매주 전 세계 희귀질환 연구진끼리 모이는 줌(Zoom) 회의도 열린다. 소아 환자를 데리고 있는 서울대병원과 성인 환자를 연구하는 해외 사례를 퍼즐처럼 맞춰보면서 원인과 진단법을 찾는다. 클리닉에 온 환자를 한명의 의사가 보는 게 아니라 유전질환에 특화돼 있는 ‘드림팀’이 진료하고 있었다.

채종희 교수는 “현대의학으로는 원인을 찾을 수 없는 희귀질환으로 인해 환자가 넘어지지 않도록 환자, 의료진, 보호자가 모두 함께 호흡을 맞춰 끝까지 완주하는 게 목표다”라면서 “‘연구의 시간’이 쌓이면 미진단질병도 해법을 찾을 수 있듯,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만 지속가능형 연구플랫폼을 구축해 후대에는 더욱 손쉽게 희귀질환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는 주춧돌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채종희 교수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해 동대학원 박사까지 마치고 1997년 서울대병원 소아과 전임의(소아신경학)를 시작으로 서울대병원 진료협력센터장, 희귀질환센터장, 정밀의료센터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임상유전체의학과 교수로 있다. 1999년 일본 국립신경센터에서 ‘노나카근육병’을 발견한 이쿠야노나카 선생님을 스승으로 두고 연구했고 2005년 미국 컬럼비아대학 신경과 유학을 마쳤다. 다음은 채 교수와의 일문일답이다.

一 어쩌다 희귀질환을 연구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원래 주전공은 소아신경학 근육병이었다. 희귀질환 중에 근육병이 차지하는 비중이 많다보니 희귀유전자 질환 연구까지 확대됐다. 일본 국립신경연구소에서 일하면서 ‘노나카근육병’을 발견한 희귀병 대가 이쿠야노나카 선생님과 함께 연구하면서 이쪽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근육병은 대부분 유전자가 원인이다보니 유전자와 관련된 기초적인 연구부터 시작하는데, 일본은 미래 세대가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근육병 환자의 조직검사 결과로 조직은행을 만들어 연구 발판을 만들더라. 우리도 이런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단기간에 성과가 나오지 않겠지만, 디지털 기술의 능력을 빌려 희귀 질환 연구의 영속적인 플랫폼을 만든다면 우리 세대에서는 빛을 보지 못하더라도 후배들은 도움을 받지 않을까 생각한다.”

一 희귀질환은 진단부터 장벽에 막힐 때가 있지 않나.

“역사적으로 보면 신약개발에 10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의료현장에서도 병명 진단부터 해결책을 찾는 과정 모두 각자 필요한 시간이 있다. 의료진 입장에서 우선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환자가 병원을 찾아 떠도는 ‘진단방랑(diagnostic odyssey)’을 줄이는 일이다.

환자를 처음으로 진료할 땐 무조건 15분 이상 시간을 들여 진료한다. 의사로서 환자에게 신뢰를 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희귀질환 환자들은 당장 눈에 띄는 변화가 없을 때 또 다른 병원을 찾아다니는데 이 때문에 치료 골든타임을 놓치기도 한다. 하지만 희귀질환의 경우 한 의사가 오래 종합적으로 볼 때 제대로 된 진단을 내릴 확률이 커진다.

근육병 문제가 있는 소아의 경우, 걷지 못하거나 힘이 없어 보일 때 유전자 때문인지, 다른 질병인지를 구분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진단을 내릴 때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내 진료를 받는 모든 환자들은 동의 하에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저장해두고 틈날 때마다 빠진 건 없는지 본다. 미세한 움직임도 진단과 해결책을 찾는 단서가 된다.”

一 진단을 내릴 때 의사 입장에서 어떤 생각이 드나.

“치료방법이 있으면 굉장히 좋겠지만, 현대의학으로도 희귀질환의 95%가 아직 특별한 치료법이 없다. 사실 유전자 변이가 원인이라고 하면, 부모가 가장 괴로워한다. 하지만 아기만 돌연변이로 희귀한 병에 걸리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래서 진단명이 나오면 꼭 하는 말이 있다. “엄마 아빠 잘못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실수하신겁니다”라고.

지금의 유전자 기술로는 고쳐 줄 수 없는 부분이 있겠지만, 옆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도와드리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재능 중 가장 많이 할 줄 아는 아이로 키워보자고 말하면 부모도 울고, 나도 울 때가 많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원인을 알면 불확실성이 해소가 된다는 점이다. 당사자뿐 아니라 식구까지 관리 측면에서 계획을 세우고 조절할 수 있다. 대게 부모 중 첫째 아이가 이렇게 되면 둘째를 낳기 꺼려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것은 현대의학기술로 조절 할 수 있다. 착상전 유전진단법(PGD)을 통해 수정란을 만들 때부터 질환이 배제되도록 만든다면 미래 자녀계획도 가능하다. 사전에 발병요인을 차단하는 것이다.”

서울대병원 임상유전체의학과에서 희귀질환 환자를 대상으로 다학제 진료를 하고 있다. 임상유전체의학과는 내과, 소아청소년과, 신경과, 진단검사의학과 등 5명의 교수와 전임의 1명, PhD가 3명이 있어 다학제 진료가 가능하다. /서울대병원 제공

서울대학교병원 임상유전체의학과는 ▲미진단 희귀질환 클리닉(소아·성인) ▲착상전·산전 유전검사 클리닉 ▲가족성 내분비대사질환 클리닉 ▲유전상담 클리닉 ▲가족성 암 클리닉 등 5개 클리닉으로 구성돼 있다. 산발적으로 이뤄지던 유전체검사와 진료를 한 곳에 모아 시행한다.

一 유전자 융합진료를 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희귀질환은 처음에는 1개의 증상으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증상이 변하거나 여러 합병증이 생긴다. 담당의사들은 일종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모든 것을 다 관리해야 한다. 여러 과가 모여서 협진진료를 하는 이유다. 협진이 안 되면 환자는 원인을 모르는 상태로 계속 다른 병원만 떠돌 수밖에 없다.

희귀질환 진료는 의사 한명이 혼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진단명이 8000여개가 넘으니 더욱 그렇다. 협진 범위를 전 세계로 넓힐 때도 있다. 한달에 2번씩 외래진료가 끝나는 오후 6시부터 9시까지 전 세계 27개국 희귀질환 관련 의료진들과 온라인 줌(Zoon) 회의를 한다. 환자 진단과 문제 해결을 위한 희귀질환 유전체 미팅이다.

소설책을 읽을 때 결말을 먼저 보면 앞에서 미궁에 빠졌던 부분의 실마리를 찾는 것처럼 소아 희귀질환을 연구하는 우리팀 입장에서 다른 나라의 성인 희귀질환 케이스를 물어본다. 그 쪽에서 단서를 주면 퍼즐 맞추듯 서로가 상호보완적인 과정을 걷는다. 결국에는 치료제 개발을 위한, 혹은 치료약제 선택을 위한 단서가 된다.

이런 글로벌 회의도 벌써 2년이 넘었다. 꽤 도움이 된다. 이 외에도 한달에 한번씩 전 세계 유전자교류프로그램(gene matcher meeting)도 따로 하고 있다. 우리 환자가 가지고 있는 이름 모를 유전자를 올리면, 전 세계 전문가들이 비슷한 유전자 이상이라고 상상되는 케이스에 대한 연락을 준다. 이에 대한 자료를 찾고 다시 비슷한 케이스를 진료한 팀에도 연락해보고 그러다보면 매일 오후 11시 넘어서 퇴근하기 일쑤다. 환자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영혼을 갈아 넣는 치열한 연구가 이뤄진다. 요즘은 줌 회의가 너무 잘 돼 있으니 비정규적 회의까지 합치면 너무 많아져 힘들 때도 있다.(웃음)”

채종희 교수는 희귀질환 진료가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와 닮은 점이 있다고 했다. 독주하지 않고 합을 맞출때 진단부터 치료까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채 교수는 "진료 장벽을 낮추는 노력을 하는데 요새는 온라인 줌 회의가 활성화 돼서 훨씬 의논하기 좋은 환경이 됐다"고 했다. /전효진 기자

一 완치가 어렵다면 진료의 목표는 무엇인가.

“사실 진단은 해 놓고 치료를 못해 환자가 악화되는 모습을 보면 의사로서 심리가 피폐해진다. 진료를 2000년대 초반부터 했으니 20년 넘게 함께 한 환자도 있는데, 같이 늙어가면서 나빠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은 썩 좋지 않다.

그래도 의사의 역할은 있다고 생각한다.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한 노력들이 있을 것이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왜 하필 이런 일이 생겼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싶고, 나와 같은 상황의 다른 환자들은 어떤지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어한다. 이런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올해부터 서울대병원 임상유전체의학과에서는 극희소질환에 대한 정보 구축을 본격적으로 해보려 한다. 임상정보와 연계된 유전체 정보를 한데 모으는 ‘SNUH바이오포탈’을 구축할 예정이다.”

一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 될 것 같다.

“그렇다. 완주하려면 넘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SMA라는 병도 1890년대에 처음 발견된 이후 1990년에 문제의 유전자를 찾을 때까지 100년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후 치료제가 나올 때까지는 30년 밖에 안 걸렸지만 거꾸로 말하면 희귀질환이 치료 가능한 질병이 되기 위해선 150년에 가까운 희생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물론 기술력이 발전하면서 점점 더 가속도가 붙는다. 이 부분을 시도하려 한다. 의사 1명이 10시간을 연구하는 것보다 1시간씩 10명의 집단지성을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인공지능 기반의 연구 플랫폼을 구상 중이다. 선배가 한 일을 넘겨받아 내가 연구하고, 내가 은퇴한 후에는 후배들이 쌓인 자산 위에서 더 빨리 연구를 진행할 수 있도록 주춧돌을 만들고 싶다.

마침 고(故) 이건희 회장 유족의 기부금 덕분에 이런 연구 플랫폼 구축을 시도할 수 있게 됐다. 정말 감사한 기부다. 보람있게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실 소아과는 수익을 많이 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미국 어린이병원들도 다 기부로 이뤄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문화가 부럽다. 전국 소아 질환을 보는 명의들과 함께 귀한 곳에 쓰도록 고민할 예정이다. 미래를 위해 써보려 한다. 치료제를 연구하는데 쓸 수도 있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데 쓸 수도 있고 방법은 많다.”

一 목표가 있다면.

“일반적으로 부모님이 희귀질환에 걸리면 자식 입장에서는 냉정하게 대처하지만, 반대로 아이가 그렇다면 포기가 안 된다. 의사인 나조차도 포기할 수 없는데 부모는 더욱 그럴 것이다. 이심전심으로 환자, 보호자, 의료진이 모두 함께 호흡을 맞춰서 달리는 느낌으로 진단부터 치료까지 함께 가려한다. 연구도 지속될 것이다. 여기저기 계속 찾아보고 물어볼 것이다. “혹시 이런 환자 보셨어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