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문태 씨엔알리서치 회장은 국내 임상시험수탁(CRO⋅Clinical Research Organization) 업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CRO는 제약·바이오 기업 의뢰를 받아 임상시험 설계와 데이터 관리, 품목허가 등을 대신하는 기업이다. 씨엔알리서치는 매출 기준 국내 1위 CRO 업체다.
윤 회장이 씨엔알리서치를 설립한 것은 지난 1997년. 윤 회장은 주먹구구식 임상시스템에서 탈피해, 계량화된 임상 시스템을 처음으로 만들어냈다. 옛 LG화학 출신인 그는 회사의 다른 동료들이 신약 후보물질을 찾으러 나설 때 해외 자료를 뒤지며 임상시험 설계에 몰두했다.
신약 개발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약에 쓰일 후보물질을 찾은 다음 동물 실험(전임상)으로 효능을 검증한 뒤, 사람에게 직접 약을 쓰는 임상시험으로 넘어간다. 신약 후보물질이 사람에게 부작용이 없고, 효과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임상 단계다.
윤 회장은 “제약사의 주된 업무가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하는 것이라면 임상설계는 이를 어떻게 세상에 내놓을지 설계하는 단계다”라며 “내 역할은 일종의 서포터다”라고 말했다. ‘서포터’를 자처한 이유를 묻자 그는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라고 답했다.
생명공학정책연구센터에 따르면 신약 하나를 개발하는 데 평균 14년의 기간과 2조원의 자본이 필요하다. 그런데 임상에만 기간은 6~7년, 자본은 1조4000억원 이상이 든다. 임상 1상에 들어간 후보물질이 신약으로 시장에 나올 확률은 9.6%에 불과하다. 임상에 차질이 생기면 신약 개발은 그걸로 끝이다.
그러니 제약사도 신약 개발 전과정에 개입하기 보다 임상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CRO를 찾게 됐다. CRO는 이제 제약·바이오업계에 있어서 명실상부한 하나의 시장을 형성했다.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은 글로벌 CRO 시장이 오는 2023년 721억달러(약 88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씨엔알리서치는 지난해 12월 코스닥시장에 상장하면서 국내 1등을 넘어 세계 시장에 도전장을 냈다. 이 회사는 조만간 미국 CRO 지분 인수를 마무리하고, 미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된다. 윤 회장은 “글로벌 제약사와 네트워크가 있는 글로벌 CRO의 지분을 인수해 업무 경험을 쌓은 뒤, 현지 법인을 설립할 계획이다”라고 했다. 더 큰 시장을 바라보며 두 번째 도약을 준비하는 윤 회장을 지난 25일 서울시 역삼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一 지난해 실적이 창립 이래 역대 최고였던 것으로 안다. 비결이 궁금하다.
“2020년 매출액은 341억원, 2021년은 432억원이다. 2년 연속으로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지난해 영업이익도 전년보다 18% 성장해 58억원을 기록했다. 회사를 지금껏 이끌어온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력이라고 본다. 특히 임상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 임상 분야도 결국 임상 경험과 노하우가 풍부한 인력을 확보하는 게 관건이다. 인력의 숫자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퀄리티 높은 인력을 확보하는 데 집중해왔다.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대유행) 시기에 임상이 늘어날 것이라고 판단해 선제적으로 인력을 충원한 것도 도움이 됐다. 지난해 한 해에만 100명가량을 미리 증원해 신규 임상시험 수주에 대비했다.”
一 코로나19가 유행하는 와중에 임상 건수가 오히려 늘어난 건가.
“그렇다. 우선 코로나 관련 임상이 늘었다.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수많은 제약·바이오 기업이 뛰어들었다. 그런데 이건 1차적인 이유다. 2차적인 이유는 제약·바이오 시장 자체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늘었다는 것이다. 돈이 더 들어오면 산업은 더 뜨겁게 굴러간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와 무관한 신약 개발 임상도 늘었다는 말이다. 한국 제약·바이오도 마찬가지다. 신약을 자체적으로 개발하려는 기업이 많이 생겼다.”
一 제약·바이오 시장 자체가 커지면서 CRO 업계도 덕을 본 것인가.
“CRO는 구조적으로 제약·바이오 시장의 성장과 같이 갈 수밖에 없다. 제약 회사들이 신약 개발을 늘리면 임상시험을 대행하는 CRO도 늘어난다. 이번에 팬데믹을 겪고 많은 직원을 뽑으면서 새삼 깨달은 것은 국내 신약 개발 분야에 우수한 인재가 아주 많다는 것이다. 씨엔알리서치가 성장해나갈 여지가 무궁무진하겠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一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의 신약이 해외 진출에 성공하는 사례도 점점 많아질까.
“신중하게 두고 봐야 할 문제다. 한국 제약·바이오는 이제 막 글로벌 시장 문턱을 두드리기 시작하는 단계에 있다. 가장 중요한 건 마케팅이다. 신약 개발 과정에서 중요한 건 여러 가지 적응증을 두루두루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마케팅이 가능한 범위도 넓어진다. 그다음은 시장 안에서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개발 중인 신약의 적응증이 A라면 그 분야에서 특출난 성과를 내온 글로벌 기업과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게 좋다. 해외 진출을 위해 법인을 낸다면 그 지역에 뿌리를 둔 글로벌 기업과 협력하는 게 큰 도움이 된다. 이런 부분이 현재 한국 제약·바이오 기업에 부족한 부분이다. 글로벌 네트워크가 약하다. 그 쪽으로 역량을 키워나가야 한다.”
一 씨엔알리서치도 해외 진출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안다.
“여러 기초 작업을 진행 중이다. 올해 들어 해외 임상 서비스에 특화한 규제과학(RA) 전문팀을 새로 꾸렸다. RA 전문팀은 미국 식품의약국(FDA), 유럽의약품청(EMA) 등 해외 허가당국에 해당 국가에서 약을 팔 수 있도록 허락받는 과정을 돕는다. 또 지난 2월에는 미국 FDA 인허가 컨설팅 전문 기업인 WRRS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씨엔알리서치로 들어온 미국 임상시험계획(IND) 승인 관련한 업무 중 일부를 WRRS가 대행한다.”
一 둘 다 허가 쪽 관련인데 임상 분야에서는 준비하는 게 없나.
“물론 있다. 그 쪽이 핵심이다. 현재 미국 CRO 업체 쪽 지분을 인수하는 계약을 진행 중이다. 아직 계약이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업명은 밝힐 수 없다. 다만 IT 임상 쪽에 특화된 기업이라는 것만 알아달라. 원래는 올해 상반기가 끝날 때 쯤, 그러니까 6월이나 7월 중으로 계약이 성사될 전망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좀 바뀌었다. 계약 체결 날짜가 조금 더 앞당겨질 수도 있다.”
一 IT 임상에 특화됐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최근 제약·바이오 업계의 글로벌 스탠다드가 IT 임상이다. 신약 개발과 임상, 허가 과정에서 IT 기반 프로그램을 쓴다는 소리다. 기존에는 임상 등 과정에서 나오는 데이터를 종이에 손으로 써넣었다. 페이퍼 CRF(Case report form)이라고 부른다. 반면 지금은 EDC(Electronic data capture) 기반으로 전부 바뀌면서 전자문서화 프로그램을 쓰는 게 보편화되는 추세다.
국내 제약사도 국내에서 만든 EDC를 사용하고 있다. 다만 FDA나 EMA 등 해외 주요 허가당국 심사를 받는데 쓰기에는 기술력이나 최적화 수준이 아무래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번에 지분을 인수할 미국 CRO는 해외 유명 제약사들을 고객으로 두고 있다. 업계에서는 IT 임상 분야의 표준을 정립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一 지분 인수가 이뤄지면 그들의 기술을 쓸 수 있는 건가.
“그렇다.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이 FDA나 EMA 등의 허가를 받는 과정에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번 지분 인수 계약과 함께 국내 신약개발사들의 미국 임상 계약 수주도 논의 중이다.”
一 해당 기업과 구축한 네트워크를 시작으로 글로벌 진출에 나서려는 것인가.
“바로 그거다. 미국 현지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기업의 지분을 인수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번 계약은 글로벌 CRO로 도약할 수 있는 주춧돌 성격도 지닌다. 원래는 아예 미국에 현지 법인을 차리는 형태로 해외 진출에 나서려 했다. 그런데 해외 업무 경험이 부족한 게 문제가 됐다. 미국 시장에서 단기간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움 받을 파트너도 없었다. 그래서 바로 법인부터 세우는 게 아니라 사업 파트너십을 먼저 구성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미국 시장 적응도부터 천천히 쌓아나가자는 방향성이다.”
一 씨엔알리서치는 확고한 국내 1위 CRO다. 역량을 키운 노하우나 비결이 있다면.
“잘하는 것에 집중하면서 잘해야 하는 것을 발굴하자는 기본 철학이 주요했다고 본다. 1997년 처음 씨엔알리서치를 세웠을 때부터 줄곧 품고 있는 생각이다. 회사 설립 초기는 임상시험 계획서를 잘 만드는 게 중요한 시기였다. 당시 한국의 임상시험 과정은 기업마다 주먹구구식에 가까웠다. 정제된 공식 같은 게 없었다. 이 때문에 임상시험계획서를 시장에 표준화시키는 차원에서 메디컬 라이팅팀부터 만들고 인재 육성과 역량 개발에 집중했다.
그다음 핵심은 항암이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 항암 분야의 임상시험 수요가 늘고 있다는 것을 포착했다. 2009년 항암 전담팀을 만들고 경험을 쌓았다. 지금은 항암 분야가 전 세계 임상시장의 30%를 차지한다. 그 과정에서 씨엔알리서치는 약 12년간 150건에 달하는 항암제 임상을 수주했다. 국내 CRO중 항암제 임상을 우리가 제일 많이 했다.
최근에는 임상시험에 있어 데이터의 중요성이 매우 커지고 있다. 데이터를 만들고 수집하고 저장하는 과정이 임상시험에서 핵심적인 요소가 됐다. 그래서 현재는 IT 임상 솔루션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미국 CRO와 지분 인수 계약을 추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보면 된다.”
一 회사 위치와 성장세를 생각하면 최근 이어진 주가 하락이 뼈아플 것 같은데.
“회사 펀더멘털(기초체력)은 튼튼하다. IT 임상과 글로벌 진출 등 나아가는 방향도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제대로 알리는 게 중요하다. 주주도 우리의 고객이나 마찬가지다. 상장 전에는 제약 회사와 직원만이 고객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사업을 추진 중인지 적극적으로 알려나갈 계획이다. 앞으로 임상의 방향은 글로벌이 중요하다. 우리의 방향인 글로벌과 IT 솔루션 중심의 육성을 계속 강조해 나갈 것이다. 다행히 최근 실적도 좋았고 앞으로도 성장이 지속되리라 보고 있다.”
一 최근 비대면 디지털 임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대응하고 있는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처음 회사를 세울 때부터 CRO는 바이오기술(BT)과 IT의 융합체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결국 병원, 제약사, CRO, 환자가 하나의 정보 풀(pool)을 공유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시점에서는 병원에서 쓰는 전자 의무기록(EMR·Electronic medical record)과 우리 회사 서버의 전자 임상 데이터를 어떻게 연동시키면 좋을 지를 고민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환자 개인정보 문제 때문에 둘이 연결돼 데이터가 자유롭게 오고 가기가 힘들다. 미국에서는 중간에서 두 정보가 호환될 수 있도록 법적인 요건이 마련돼있다. 한국에도 그런 움직임이 필요하다.”
一 CRO를 비롯한 ‘K-바이오’ 육성에 국가나 제도 차원의 역할도 중요한 것인가.
“물론이다. 앞서 언급한 제도적 문제도 있지만 가장 큰 어려움은 인력부족이다. 국가에서 월 100만원가량 인턴 비용을 지원해주는 게 있다. 추가적인 바람으로는 한국 제약사가 해외 임상을 갈 때 국내 CRO와 함께 가도록 해준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이런 문제는 국가 간 산업 문제로 번질 수 있어 쉽지 않은 것으로 안다.
아울러 CRO 산업은 별도 산업 분류코드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카테고리 미분류 문제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세제 혜택을 받기 어렵고 국책 연구 등에도 제한 사항이 많다. 현재 CRO 업계는 ‘기타 서비스업’으로 분류돼 있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국가적 지원이 들어오는 데 한계가 있다. CRO 협회에서도 이 부분을 해결하려 힘을 쓰고 있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정말로 K-바이오가 크게 성장하길 원한다면 국가가 이런 미세한 부분부터 고쳐나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