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 홍 바이엘 법무총괄이 18일 조선비즈와 인터뷰하고 있다. /바이엘 제공

18일 서울 여의도 바이엘 코리아 본사 회의실에 올리브색 플리츠 스커트를 입고 몸에 꼭 맞는 검은색 가죽 목걸이를 한 여성이 들어왔다. 이 회사 법무⋅윤리경영(컴플라이언스)팀 엘렌 홍(53) 총괄이었다. 사법연수원 26기 검사 출신인 홍 총괄은 글로벌 제약사의 지식재산권(IP) 분쟁 송사를 처리해 온 임원인데, 첫인상은 마치 디자인 회사 직원 같았다.

서울대 법대 출신인 홍 총괄은 검사 임용까지 탄탄대로를 걸었다. 서울대를 입학해 졸업하자마자 300명 뽑는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로 임용됐다. 법무부 근무 시절 하버드대 로스쿨 석사(LLM) 연수길에 올랐다. 그런데 미국에서 학위를 취득한 후 검찰에 돌연 사직서를 내고 국내 대형 로펌을 마다하고 외국계 기업에 갔다.

홍 총괄은 도전 배경을 묻는 질문에 "검사 출신이지만 형사 변호사보다는 기업 쪽 법무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홍 총괄은 '여성으로서 어려운 점은 없었냐'는 질문에 "한국 사회에서 구조적인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스스로는 여성으로 (제도적인) 수혜를 봤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그는 "요즘에는 여성이건 남성이건 조직에 필요한 인재라면 가리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는 국내 제약 시장 지식재산권 동향을 묻는 질문엔 "한국 정부는 지식재산권 원 보유자인 개발자보다 후발주자를 지원하는 약가 정책 및 특허 정책을 펴 왔다"고 쓴소리를 했다.

홍 총괄은 직장 생활의 최고 덕목으로 "헝그리 정신(열심히 하는 정신)과 커뮤니케이션(소통)"을 꼽았다. 올해 9살인 딸을 키우는 워킹맘이기도 한 홍 총괄을 서울 여의도 바이엘 코리아 본사에서 만났다. 서울에서 초⋅중⋅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붙은 토종 한국인이지만 이날 인터뷰는 영어 이름인 '엘렌 홍'으로 진행했다.

一 사법연수원 26기 검사 출신이라고 들었다. 어떻게 글로벌 기업에 오게 됐나.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연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태어나서 미국 땅을 밟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전 세계 80여개국에서 150여명의 학생과 수업을 듣는데, 나보다 대여섯살은 어린 그들을 보면서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라고 느꼈다. 좀 더 큰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一 미국에서 도전 과정도 궁금하다.

"국제상업회의소(ICC) 같은 국제기구에 도전했는데, 여러 번 낙방했다. 한 곳에는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었는데, 합격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준비가 부족했던 것 같다."

一 낙방 후 상실감은 없었나.

"뭐 그럴 것까지 있나. 사람 인생이 거기서 끝이 아닌데. 이후에도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MBA)에 들어가려고 GMAT 시험을 보기도 했다. 입학은 하지 않고, 한국에 다시 들어오긴 했지만."

엘렌 홍 한국바이엘 법무총괄이 18일 서울 여의도 한국바이엘 본사에서 조선비즈와 인터뷰하고 있다. /바이엘 제공

一 워킹맘으로서 사회생활이나 가정생활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딸 아이가 만 3세였던 무렵 국제공인관리회계사(CMA) 공부를 시작했다. 퇴근 후, 주말마다 주먹밥을 싸 들고 독서실에 가서 8시간 공부를 했다. 변호사 외에 다른 자격증을 따려면 그때 밖에는 시간이 없을 것 같았다. 공부할 때엔 남편이 딸아이를 봤다. 남편이 처음에 아이에게 잠옷만 입혀 키즈카페로 외출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一 지금 딸과 아버지의 관계는 어떤가

"지금 딸과 아빠의 관계는 내가 부러울 정도로 끈끈하다. 그리고 그 당시 남편이 적극적으로 도와준 덕분에 자격증을 하나 더 딸 수 있었다. 지금은 남편이 바쁜 시기라서, 내가 주(主) 양육자 역할을 하고 있다. 각자 인생의 곡선에 따라서 역할을 분담한다면 아이와 함께 부부도 동반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남편과 내 관계는, '전우애' 같은 끈끈함이 있다."

一 법조계는 보수적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여성으로 불이익은 없었나.

"오히려 나는 시대를 잘 탔다고 생각한다.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로 임용된 때도 여성으로서 수혜를 봤다. 총 300명 정원인 사법시험에서 여성 31명이 뽑혔다. 검사에 임용 당시 여성 검사 수는 나를 포함해 20명이었다. 그렇게 300명 중 31명 하던 여성 법조인이, 이제는 전체 변호사 시험 합격자에서 절반이 넘지 않나."

一 요즘 공직사회가 많이 변했다는 뜻인가.

"요즘 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최고위급(Top level)에서는 여성 인력의 활용 방안을 고민했다. 남성 만으로 구성된 조직은 지속가능성이 떨어진다고 봤다. 명백히 소수인 여성 인력에 대한 지원이 뒷받침됐다. (변호사 시험 합격자 절반이 여성인 것은) 우리 사회에 그런 노력이 성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홍 총괄은 다만 유리천장은 존재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법조계에서 사용하는 은어로 변호사는 '찍새(구두를 모아오는 사람을 가리키는 속어)'와 '딱새(구두를 닦는 사람)'로 구분한다. '찍새'는 사건을 맡아오는 관리자급, 딱새는 법원에 제출할 서류를 쓰고 잡무를 하는 실무진을 뜻한다.

홍 총괄은 "딱새에서는 여성과 남성 구분이 없는데, 찍새로 올라가면 여성의 비중이 줄어든다"고 했다. 홍 총괄 말대로 국내 로펌에서 찍새로 불리는 파트너급 변호사의 여성 비중은 5% 남짓이다. 미국 대형 로펌에서 이 비중은 30%에 이른다. 홍 총괄은 "해외에선 딱새를 계속 대접하는 문화가 있어서 고위급에도 여성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一 이런 문제는 어떻게 풀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나.

"이제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직장 생활에서 밀리지는 않을 상황이라고 본다. 직장에서 여성들이 남성과 교류를 더 많이 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사회적으로 서로 윈윈할 상황을 끊임없이 모색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실력을 쌓아야 한다."

一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면서 힘든 점은 없나.

"전혀. 한국 변호사 자격을 가지고 현업에서 경력이 있는 것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해 왔다. 한국에서 법안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판결이 선고되기까지 과정을 다 알고 있으니 일이 오히려 수월하다. 오죽하면 전 직장에서는 내 별명이 '자판기'였다. 물어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고."

一 현실적으로 자녀를 키우면서 회사 생활을 하는 것은 힘에 부친다.

"바이엘은 주 2회 재택근무 및 유연근무 제도를 두고 있다. 한국도 출산휴가, 육아휴직 등의 제도는 잘 갖춰져 있는 편이다. (한국은 2019년 배우자의 유급 출산휴가를 3일에서 10일로 늘렸다.) 하지만 제도보다 더 중요한 건 이런 제도를 눈치 보지 않고 활용할 수 있는 문화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바이엘은 이런 문화가 정착돼 있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포용할 줄 아는 기업문화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一 기업문화를 좀 더 설명해 줄 수 있나.

"기업 윤리 차원에서도 칭찬할 만 하다. 법무윤리경영(컴플라이언스)팀은 기업이 관련 법령과 윤리를 준수하면서 활동하도록 점검하는 역할을 한다. 한국 기업의 컴플라이언스가 발생한 문제를 처리하는 창구 역할을 한다면, 바이엘에서는 최고위급 의사 결정 과정에 컴플라이언스가 직접 참여한다. 중요한 의사 결정에서 '아니다'라는 의견을 직접 낼 수 있다는 뜻이다. "

一 여성 리더의 역할은.

"리더의 역할에 남녀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리더의 역할은 인재를 발굴하고 그 인재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10년 동안 바이엘에 근무하면서, 인재를 발굴하는 기준에 '성(姓⋅젠더)'이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여성이건 남성이건 조직에 필요한 인재라면 가리지 않고 지원할 수 있는 다양성을 지향하는 조직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남녀를 떠나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엘렌 홍 바이엘 법무총괄이 18일 조선비즈와 인터뷰하고 있다. /바이엘 제공

一 그나저나 팀 안에서 사람을 뽑을 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보나.

"헝그리정신(열심히 하는 정신)과 커뮤니케이션(소통)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 남들이 하던 대로만 해서는 발전이 없다. 회사에서 성과를 내려면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고민하고, 답을 찾아내는 '셀프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 상사의 지시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스스로를 '교환수'로 낮추는 일이다."

一 마지막으로, 혹시 깨고 싶은 편견이 있나.

"편견을 깨는 것의 궁극적인 의미를 뭐라고 생각하시나. 나만 해도 회사에서는 일을 하면서, 딸과 다닐 때는 예쁜 엄마이고 싶다. 문화와 패션에도 관심이 많다. 영국 드라마와 일본 만화도 즐긴다. 나의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스스로 포용하고 인정하듯, 다른 사람의 다양성도 존중하고 포용하는 것이 편견을 깨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홍 총괄은 "20여년 전 검사로 있을 때 '임신하면 남들보다 승진이 5년 늦어진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이 말은 여성 직장인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지만, 반대로 사람마다 제각각인 인생 곡선을 인정해 줘야 한다는 방증도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50대에 은퇴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70대에 대통령에 당선됐다"며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인생 곡선의 높낮이를 비교하는 게 무슨 의미 있나요"라고 했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놓고 찬반 논란이 이어지는 지금, 유리천장을 뚫고 올라가는 홍 총괄은 이렇게 말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각자의 인생에 따라 '쉼표 구간'을 주고 서로 인정해 주는 문화가 필요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