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제일모직의 성장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지난달 삼성바이오로직스, 삼성바이오에피스 등 바이오제약 계열사의 현황을 공개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가 지난 1월 미국 바이오기업인 바이오젠이 보유한 삼성바이오에피스(이하 에피스) 지분 전량인 ‘50%-1주(1034만1852주)’ 인수 계획을 발표한 지 한 달여가 지났다. 발표 이후 에피스의 인수 가격이 2조7700억원으로 시장 평가 기업가치(약 17조원)에 비해 턱없이 낮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 배경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바이오 업계에서는 삼성바이오가 바이오젠의 급박한 사정을 영리하게 잘 파고들면서 유리하게 매각을 이끌어냈다고 봤다.

◇ 삼성바이오, 에피스 지분 싸게 매입

1일 조선비즈가 지난해 8월부터 2월 현재까지 발간된 국내 11개 증권사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이들이 추정한 에피스의 시장 가치는 적게는 8조원에서 많게는 28조원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바이오가 에피스 전체 주식의 절반(50%-1주)을 사들인 가격은 약 2조7700억원이다. 에피스 지분의 가치를 시장 가치의 절반으로 단순 계산(4조~14조원)해도 매입가와 비교하면 2~5배에 달한다.

김명지 기자

통상 대규모 지분 거래를 할 때는 웃돈(프리미엄)이 붙기 마련인데, 이번 매매계약에서는 그런 것도 없었다. 그러자 제약⋅바이오 업계와 증권가에서 삼성바이오가 에피스 지분을 염가에 매입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인수 가격이 공개된 초기에 증권가에서는 바이오젠이 글로벌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 시장의 성장성을 낮게 평가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하지만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다. 생명공학정책연구센터가 지난해 발간한 ‘글로벌 바이오시밀러 시장 현황 및 전망’에서 글로벌 바이오시밀러 산업은 오는 2026년까지 연평균 23.5% 성장할 것으로 전망됐다.

에피스 자체에도 영업에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지난해 실적도 견조했고, 성장 가능성도 크다는 평가다. 한울회계법인에 따르면 에피스의 지난해 매출은 8470억원, 영업이익은 1927억원을 기록했다. 한울에서는 에피스의 연 매출이 오는 2031년 3조2090억원, 영업이익 1조5868억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에피스는 최근 자가면역질환 치료제와 항암제 5종 등 바이오시밀러 제품을 출시하면서 시장 점유율을 확대했고, 미국과 유럽에 각각 5건과 6건의 바이오시밀러 판매 허가를 갖고 있다. 당장 오는 2023년 6월 류마티스 관절염 치료제인 휴미라의 바이오시밀러인 ‘하드리마’를 미국에 출시할 예정이었다.

◇ “바이오젠, 에피스 매각 대금 M&A 활용할 듯”

그러자 바이오젠이 에피스 지분을 급하게 매각할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이 있었을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바이오젠은 지난해 세계 최초 알츠하이머 치료제인 ‘아두헬름’을 미국 시장에 출시하면서 주목을 받았지만, 효과성 논란으로 매출은 지지부진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7일(현지시간) 자국 제약사 바이오젠과 일본의 에자이(Eisai) 제약사가 함께 개발한 알츠하이머병 신약 '애드유헬름'(Aduhelm)을 승인했다. FDA가 알츠하이머병 관련 신약을 승인한 것은 2003년 이후 18년 만이다. 사진은 에드유헬름 약병과 포장 상자의 모습./ 바이오젠 제공

바이오젠은 지난해 하반기 아두헬름의 약값을 50%나 깎았고, 지난달에는 5억달러(약 6032억원) 규모의 비용 절감 계획을 발표했다. 주력 제품의 실적 부진으로 자금 확보가 시급해 지분을 급히 넘겼다는 것이다.

임윤진 대신증권 연구원은 보고서에서 “미국 메디케어(건강보험)가 아두헬름의 보험 커버리지(적용 한도)를 제한하면서 시장 확대가 쉽지 않아 보인다”며 “에피스 지분 매각 대금을 추가 임상 및 인수합병(M&A)에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삼성바이오가 바이오젠과 지난 2020년부터 벌인 국제 중재가 이번 인수전에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바이오젠은 지난해 9월 분기보고서에서 지난 2020년 12월 17일 국제상업회의소(ICC) 국제중재법원에 삼성바이오에 대한 중재를 신청했는데, 삼성바이오가 도리어 합작 투자계약 위반을 주장하며 손해배상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두 회사는 지난 2011년 12월 6일 에피스를 설립하면서 합작 투자 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에는 두 회사가 독자적인 바이오시밀러 의약품 사업을 하지 않는다는 ‘경쟁금지(Non Competition)’ 조항이 있었는데, 바이오젠이 이 조항을 피할 수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ICC에 중재를 신청했다가, 삼성바이오에 역소송을 당했단 것이다.

2021년 9월 30일 바이오젠 분기보고서. 4분기 중 ICC청문회가 예정돼 있으며,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역소송을 제기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바이오젠 분기보고서 캡처.

ICC 중재는 지난해 4분기 청문회 이후 최종 판정만 남긴 상태였다. 바이오젠은 지난 1월 돌연 에피스 지분을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법조계에서는 삼성바이오가 에피스 지분을 인수한 것을 두고 ICC중재에서 삼성바이오가 사실상 승소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ICC의 중재 판정은 재판과 동일한 효력을 갖고, 단 1심으로 완결된다.

◇ 에피스, 삼성바이오의 새로운 성장 엔진으로

이번 지분 인수 계약이 삼성바이오에 또 하나의 성장 엔진이 될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삼성바이오의 위탁생산개발(CDMO) 역량에 에피스의 신약개발 역량이 더해져 시너지를 낼 것이란 얘기다.

삼성바이오에피스 바이오시밀러 2종 3분기 실적 현황.

에피스는 바이오 의약품 개발 기술은 물론 미국 식품의약국(FDA)을 비롯해 전 세계 주요 허가당국의 인허가 노하우를 갖고 있다. 단독 경영 체제로 신속한 의사결정이 가능해졌고, 더욱 적극적인 사업 활동이 가능해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강하나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보고서에서 “이번 인수를 통해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빠른 성장과 수익 창출, 실적 외형 성장 및 주주가치 증대가 가능해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앞서 삼성 그룹은 바이오사업을 ▲위탁생산개발(CDMO) ▲바이오시밀러 ▲신약 개발에 이르는 3대 축을 중심으로 글로벌 종합바이오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비전을 공개했다.

삼성바이오는 오는 4월 30일 1차 대금 10억달러(약 1조2000억원)를 납부하고, 나머지 대금은 오는 2023년부터 2024년까지 2회에 걸쳐 지급하기로 했다. 인수금액에는 바이오젠이 특정 재무요건을 충족하면 최대 5000만달러(약 600억원) 규모의 이익을 배분하는 ‘언아웃’ 조항이 포함됐다. 관련 이익 배분 규모 등은 오는 2027년 결정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