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글로벌 백신 허브 조성을 목표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원료⋅부자재 기업에 180억원의 예산을 투입한다. 그런데 최근 정부가 백신 공급 본계약 없이 '협력 의향서(LOI)'나 '양해각서(MOU)'만 있어도 이 기업들에 예산을 지원하기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확인됐다. 올해 안에 국내 기업이 실질적인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6일 제약·바이오업계와 국회 보건복지위 등에 따르면 보건복지부는 올해 2차 추경안과 이런 내용의 사업설명자료를 제출했다. 원부자재는 백신 제조 원료와 부자재를 뜻한다. 백신 원료로 쓰이는 단백질 효소부터 백신을 담는 병(바이알)까지 모두 포함한다.
글로벌 백신 제조 기업이 사용하는 원부자재는 현재 미국, 독일 등 해외에서 대부분 생산되고 있다. 그동안 국산 백신 개발에서 넘어야 할 난관으로 백신 원부자재 조달이 꼽혔다. 정부는 생산 독려 차원에서 다국적 백신 개발사와 공급 계약을 체결하거나 국내 백신 개발사와 컨소시움을 구성한 제조사에 10억원에서 30억원까지 국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문제는 정부가 국내외 백신 개발사와 LOI나 MOU만 체결해도 지원 대상에 포함했다는 점이다. 제약·바이오업계 관계자는 "올해 안에 (원부자재 기업들이) 백신 관련 계약 체결에 이르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본 것 같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도 "본 계약은 힘들어도 올해 안에 LOI나 MOU까지는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며 "올해 안에 반드시 예산을 쓸 것"이라고 했다.
추경은 내년 본예산까지 기다릴 수 없는 긴급한 목적으로 편성하는 예산이다. 이 때문에 정부는 추경으로 편성 예산은 그 해에 반드시 써야 한다는 암묵적 기준을 두고 있다. 결국 정부의 예산 소진 방침으로 올해 안에 백신 원료나 부자재를 만들어서 백신 개발사에 납품하겠다는 MOU만 체결하는 기업은 최대 30억원의 국비 지원을 받게 된다.
'글로벌 백신 허브' 조성을 위한 단기적 성과 내기에 급급해 정부가 추경 예산을 부실 심사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조명희 의원은 "코로나19 백신을 빠르게 개발한 미국 정부는 꼭 필요한 연구라고 판단하면 거액의 돈을 적기에 지원해 성과를 낸다"며 "한국은 공무원들이 '보여주기식 성과'에만 몰두하면서 사업 성과는 내지 못하고, 세금만 낭비하는 꼴"이라고 했다.
고려대 최재욱 예방의학과 교수는 "180억원이라는 예산을 전체 정부 예산으로 보자면 크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며 "'나눠먹기'식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최 교수는 "백신 허브를 하겠다는 '생색내기' 예산에 돈을 뿌리기보다, 지금은 한국이 백신 제조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데 예산을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해 지원 받은 기업은 그 금액 이상 백신 개발 및 설비에 투자(매칭)하게 하도록 했고, 지원 대상 기업을 선정할 때도 외부심의위원회를 거쳐 공정하고 투명하게 예산을 집행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