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레바논 친이란 무장 정파 헤즈볼라의 최고 지도자가 사망한 가운데, 전쟁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헤즈볼라의 정치적 존재감은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란이 전면에 나서 헤즈볼라를 지원하면서 전후 협상 국면의 핵심 변수로 다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일간 르 몽드는 "헤즈볼라가 이번 전쟁을 정치적 재기의 기회로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헤즈볼라는 2023년 하마스 지원을 명분으로, 올해 3월에는 이란 지원을 명분으로 이스라엘과 충돌해 왔다. 이스라엘은 레바논 전역의 헤즈볼라 군사 시설을 폭격하고 안보 위협 해소를 명분으로 남부에 대규모 지상군을 투입하며 강경 대응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헤즈볼라 전투원과 민간인을 포함해 3000명 이상이 숨지고, 100만 명이 넘는 피란민이 발생했다.
전환점은 이란의 직접 개입이었다. 지난 7~8일 밤 이란은 베이루트 남부 공습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 북부를 향해 탄도미사일 11발을 발사했다. 르 몽드는 "이란의 지원이 헤즈볼라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고 있다"며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시아파 공동체 내 입지가 약화됐던 헤즈볼라가 다시 레바논과 중동 정세의 핵심 행위자로 떠오르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헤즈볼라는 자신을 배제한 채 진행되는 미국 주도의 휴전 협상을 경계하고 있다. 레바논 정부는 지난 3일 미국 중재 아래 휴전 원칙에 동의했다. 헤즈볼라의 대이스라엘 공격 중단과 전투원의 리타니강 이북 철수를 조건으로 내걸었지만,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남부 점령지 철수는 명시하지 않았다. 헤즈볼라 지도자 나임 카셈은 이를 즉각 거부하며 "굴욕적인 합의"라고 비판했다.
역설적으로 헤즈볼라는 최근 미국과의 접촉 사실 자체를 성과로 받아들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헤즈볼라와의 간접 접촉 사실을 공개하자, 헤즈볼라 내부에서는 "미국이 결국 헤즈볼라를 협상 상대로 인정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군사 조직인 동시에 정치 세력인 헤즈볼라로서는 국제 협상 테이블에 다시 이름을 올린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실제로 헤즈볼라는 2024년 전쟁 직후보다 현재 상황을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당시에는 최고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가 사망하고 창설 세대 지도부 대부분이 제거됐으며, 전투원 3000여 명을 잃었다. 그러나 이후 이란 혁명수비대의 지원을 받아 군사 조직을 상당 부분 재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헤즈볼라의 '승리 서사'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레바논 남부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있다. 시아파 공동체의 기반이던 수십 개 마을도 사실상 폐허가 된 상태다. 전쟁이 끝난 뒤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이 헤즈볼라에 책임을 묻기 시작하면 현재의 지지세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전쟁 이후 레바논 내 헤즈볼라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10일(현지 시각) 레바논 국민에게 전하는 영상 메시지를 내고 헤즈볼라에 맞서 행동에 나서 달라고 호소했다. 같은 날 이츠하크 헤르조그 이스라엘 대통령도 조셉 아운 레바논 대통령에게 아랍어로 메시지를 보내 헤즈볼라의 영향력 통제를 전제로 한 양국 간 평화 정착 의지를 피력했다.
전문가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헤즈볼라 문제가 레바논 정국의 최대 변수로 남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군사적으로는 큰 상처를 입었지만, 역설적으로 전후 질서를 결정하는 협상 국면에서는 오히려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