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20일(현지시각) 라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을 1996년 민간 항공기 격추 사건과 관련해 살인·공모 혐의로 기소했다. 그런 한편 같은 날 쿠바 국민에게는 식량·의약품 1억달러(약 1500억원) 어치를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쿠바 정권은 역사적 정당성을 문제 삼아 형사 재판대에 세우고, 전력난·식량난에 시달리는 쿠바 국민들에게는 미국이 직접 구호자로 다가서겠다는 양면전술로 풀이된다.

미 법무부는 이날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라울과 쿠바 정권 관계자 5명을 미국 국적자 살해 공모, 항공기 파괴 2건, 살인 4건 혐의로 기소했다고 발표했다. 마이애미 연방 대배심은 4월 말 기소장을 비공개로 작성해 뒀다가, 쿠바 독립기념일인 이날에 맞춰 공개했다.

같은 시각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스페인어 영상 메시지로 쿠바 국민을 향한 인도주의 지원안을 내놨다. 단 지원 물자는 쿠바 정부를 거치지 않고 가톨릭교회나 신뢰할 수 있는 자선단체를 통해 직접 배분돼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2024년 1월 1일 쿠바 산티아고에서 열린 혁명승리 65주년 기념 행사에서 라울 카스트로 전 쿠바 대통령이 쿠바 국기를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은 이번 라울 카스트로 기소 이유로 1996년 2월 24일 발생했던 '브라더스 투 더 레스큐(Brothers to the Rescue)' 소속 민간기 격추 사건을 들었다. 이 단체는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본부를 둔 쿠바 망명자 모임으로, 주로 플로리다 해협 인근에서 쿠바 난민을 찾아내 구조하는 일을 맡았다. 30년 전 사건 당일 이 단체 소속 비무장 프로펠러기 2대는 쿠바 공군 소속 미그 전투기가 발사한 공대공 미사일을 맞고 추락했다. 당시 카를로스 코스타 등 24~45세 미국 국적자 4명이 숨졌고, 이들 시신은 끝내 수습되지 못했다.

미 법무부는 기소장에 격추된 장소가 쿠바 영해가 아닌 국제수역 상공이었다는 점과 함께 당시 국방장관이던 라울이 무력 사용을 직접 지시했다고 적시했다. 미 정부가 2006년 공개한 1996년 6월 녹취록에 따르면 라울은 쿠바 공군에 "녀석들이 나타나면 바다로 처박으라(knock them down into the sea when they show up)"고 지시한 음성이 나온다. 미주기구(OAS) 인권위원회는 1999년 보고서에서 이 사건을 "민간 항공기에 대한 불균형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 무력 사용"으로 규정했다. 기소장에 적힌 살인·살해 공모 혐의에 따른 미 법정 최고형은 사형 또는 종신형이다.

토드 블랜치 미 법무장관 대행은 이날 마이애미 발표 현장에서 "카스트로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됐다"며 "그가 자발적으로 오든 다른 방식으로 오든 이곳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블랜치 대행은 발표 장소를 워싱턴이 아닌 마이애미로 정한 이유에 대해 "이곳 지역사회는 미국 어느 지역보다 쿠바 정권 역사를 잘 안다"고 했다.

라울은 단순한 전직 쿠바 지도자 수준 인물이 아니다. 그는 1959년 형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친미(親美)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린 혁명 1세대 대표 인물이다. 수십 년간 국방장관으로 군부를 장악했고, 형이 물러난 2008년부터 2018년까지는 쿠바 최고 지도자를 지냈다. 2021년까지는 공산당 제1서기로 당을 통제했다. 군·당·국가 권력을 모두 거친 카스트로 체제의 살아 있는 상징이다.

국제 관계 전문가들은 이번 기소가 현 정부 정책을 문제 삼는 수준을 넘어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60년 넘게 이어진 카스트로 체제의 정당성에 형사 책임을 묻겠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올해 1월 자국에서 체포돼 미국에 수감된 베네수엘라 니콜라스 마두로 전 대통령처럼 쿠바 혁명 상징을 미국 사법체계의 형사 피고인으로 끌어내리겠다는 뜻이다.

미국 국가안보문서보관소 미·쿠바 관계 전문가 피터 콘블루는 AP에 "쿠바 지도부는 이 위협을 극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다"며 "라울은 이제부터 머리를 푹 숙이고 살아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쿠바는 현재 사상 최악 수준의 경제 위기를 겪고 있다. 미국 제재로 연료 수급이 끊기면서 수도 하바나 주요 지역은 하루 20~22시간 정전이 일상화됐다. 쿠바 에너지 장관조차 남은 디젤이나 연료유 비축분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식량과 의약품도 동났다.

루비오 장관은 이날 영상에서 "전기·연료·식량이 없는 진짜 이유는 쿠바를 통제하는 자들이 수십억달러를 약탈했기 때문"이라며 국가 붕괴 책임을 부패한 쿠바 정권으로 돌렸다. 그는 이어 "쿠바 국민이 카리브해 다른 나라처럼 자유를 누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라며 새 체제를 요구했다.

이날은 1902년 쿠바 공화국이 미군정에서 벗어나 공식 출범한 독립기념일이다. 쿠바는 미 군정을 마치는 대가로 미국이 언제든 쿠바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권한과 관타나모 해군기지를 영구적으로 빌려주는 '플랫 수정안(Platt Amendment)'을 헌법 조항으로 넣어야 했다. 스페인으로부터 풀려났지만, 미국 간섭을 합법화한 반쪽짜리 독립에 가까웠다. 피델 카스트로 혁명 정권은 1959년 이 날을 공식 국경일에서 지우면서 "진정한 독립은 미국 영향력을 끊어낸 1959년부터"라고 선언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카스트로 체제가 부정해 온 '또 다른 독립기념일'을 굳이 골라 이 날이 가진 의미를 의도적으로 끌어올렸다.

발표 장소도 워싱턴이 아닌 마이애미였다.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미국 내 쿠바계 인구는 293만5000명, 이 중 61%가 플로리다에, 42%가 마이애미권에 거주한다. 전문가들은 이번 기소와 원조 제안이 보수 성향 쿠바계 유권자와 망명자 사회를 정조준한 메시지라고 풀이했다. 실제 이날 발표 현장에서 블랜치 대행이 라울을 기소하겠다고 발표하자 참석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자유 쿠바를 외치며 환호했다.

쿠바 정부는 라울 기소에 강하게 반발했다.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은 X에 "어떠한 법적 근거도 없는 정치적 조치"라며 "쿠바에 대한 군사적 침략이라는 어리석은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조작"이라고 했다. 이어 1996년 격추는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들의 거듭된 도발에 맞선 영토 자위권 행사"라고 주장했다. 브루노 로드리게스 쿠바 외무장관도 X에서 루비오 장관을 "남부 플로리다에 집중된 부패하고 보복적 이익집단의 확성기"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전문가들은 94세 초고령인 라울이 실제 미국 법정 출두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내다봤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코네티컷 해안경비대 사관학교 졸업 연설 후 기자들과 만나 "(쿠바와) 확전은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고 본다"며 군사 충돌에 선을 그었다. 기소 자체만으로 라울을 포함한 쿠바 지도부 해외 이동을 불편하게 하고, 쿠바가 제 3국과 외교적으로 접촉하는 데 상당한 부담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