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전쟁에 국제 사회 시선이 쏠리면서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이잠시 답보 상태에 머문 사이, 문화예술계 최고 권위 행사인 베니스 비엔날레 참가를 두고 러시아와 유럽연합(EU)이 정면 충돌하고 있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1895년 출발한 세계 최고 권위 현대미술 행사다. 미술계에선 '아트 올림픽'으로 통한다. 각 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총출동하는 국가관(national pavilion)과 국적에 얽매이지 않고 총감독이 꾸리는 본전시가 함께 벌어진다. 2022년 전시엔 팬데믹 여파에도 관람객이 80만명 넘게 몰렸다. 다음달 9일 개막하는 올해 전시에도 100개국이 참여한다.
러시아는 올해 4년 만에 국가관 복귀를 확정했다. 사실상 전쟁 개시 후 첫 국제 문화무대 복귀다. 러시아는 2022년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직후 국제사회 눈총을 받자 커미셔너와 작가들이 사퇴하면서 관을 닫았다. 2024년에도 불참했다.
러시아 복귀 소식에 유럽은 강하게 반발했다. 카야 칼라스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21일(현지시각) 룩셈부르크 EU 외교장관 회의 직후 기자회견에서 "러시아는 박물관을 폭격하고 교회를 파괴하며 우크라이나 문화를 지우려 했다"며 "자국 문화를 전시하도록 허용해선 안 된다"고 했다. 칼라스 대표는 "러시아의 베니스 비엔날레 복귀는 도덕적으로 잘못됐으며, EU는 지원금을 삭감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EU 집행위 산하 교육문화집행청(EACEA)은 지원금 삭감 내용을 담은 공문을 피에트란젤로 부타푸오코 비엔날레 재단 이사장에게 보냈다. 시정 조치를 내놓지 않으면 2028년 제62회 비엔날레 지원금 200만 유로(약 32억 원·3년치)를 정지·회수하겠다는 내용이다. 시한은 개막 이틀 뒤인 11일이다. 유럽의회 의원 37명도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과 칼라스 대표에게 베니스 비엔날레 지원금 중단을 요구하는 공동 서한을 보냈다.
핀란드 정부와 아그네세 라체 라트비아 문화장관은 러시아 참가에 분노를 표하며 5월 9일 개막식 불참을 선언했다. 라트비아는 문화부 주도로 나온 러시아 배제 공동성명을 내고 25개국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고 유로뉴스는 전했다.
러시아 참가를 반대하는 진영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문화유산을 조직적으로 파괴하는 가운데, 베네치아에서 문화국가 행세를 하는 모순을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는 이달 15일 기준 러시아 침공으로 피해를 입은 우크라이나 문화유산이 526곳에 달한다고 했다. 이 중에는 종교시설 153곳, 역사·예술적 가치를 지닌 건물 275곳, 박물관 39곳, 기념물 33곳, 도서관 21곳이 포함됐다. AP는 러시아 점령지에 우크라이나 박물관 소장품 210만 점 이상이 남아 있고, 탈환 지역에서 확인한 약탈 유물만 3만5000점을 넘는다고 전했다.
러시아관 운영진 면면도 논란을 키웠다. 각 국가관은 해당국 커미셔너가 책임진다. 2021년부터 러시아관 커미셔너로 임명된 아나스타시아 카르네예바는 부친이 러시아 국영 방산 대기업 로스텍(Rostec) 부사장 니콜라이 볼로부예프다. 로스텍은 2007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세운 국영 방산 지주회사로, 2014년부터 미국·EU 제재를 받고 있다. 카르네예바 디렉터 부친 볼로부예프도 옛 KGB와 FSB(연방보안국) 장성 출신으로 미국·영국·캐나다 제재 대상에 올라 있다. 카르네예바와 아트컨설팅 회사 스마트아트를 같이 세운 예카테리나 비노쿠로바는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 딸이다.
즉 우크라이나 침공을 주도한 방산·외교 네트워크가 베니스 비엔날레 러시아관을 운영하는 구조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탈리아에 "카르네예바 등 러시아관 관계자 5명을 제재하고 비자 발급을 중단해달라"고 요구했다. 러시아관을 단순한 미술품 전시공간이 아니라 국가 소프트파워를 알리는 장치로 본다는 뜻이다.
비엔날레 측은 '대화와 개방' 논리로 맞섰다. 주최 측은 "어떤 형태의 검열도 거부한다"며 "예술과 정치는 분리돼야 한다"는 입장을 반복해왔다. 이탈리아가 국가로 인정한 나라면 절차에 따라 참가할 수 있다는 제도적 한계도 강조했다.
마테오 살비니 이탈리아 부총리는 22일 기자들과 만나 "러시아관은 러시아 소유이며 비엔날레나 이탈리아 정부 통제 밖"이라며 개막식에 예정대로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는 EU의 200만 유로 철회 위협에도 "무지에서 나온 쩨쩨함(ignorant pettiness)"이라고 비난했다.
분야별 온도차도 크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2024년 파리 하계올림픽과 2026년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에서 러시아·벨라루스 선수 일부에 한해 개인중립선수(AIN) 자격으로만 참가를 허용했다. 러시아 국기와 국가(國歌)·선수단으로 참여하는 단체 종목은 출전을 원천적으로 금지했다.
러시아는 논란 여부와 상관없이 참가를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카르네예바 러시아관 디렉터는 최근 러시아 매체 인터뷰에서 "우리는 프로젝트를 계속 준비하고 있으며, 우리 쪽에서 먼저 취소하는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 전문가들은 베니스 비엔날레 같은 국제행사에서 러시아 입지가 전면 정상화에 앞서 분야별 틈새 복귀 형태로 파편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