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과 이란의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정권을 무너뜨린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사실상 다음 타깃으로 쿠바를 지목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대통령에게 사임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16일(현지 시각) 뉴욕타임스(NYT)는 익명의 소식통 4명을 인용해 "트럼프 행정부가 디아스카넬 대통령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려 하고 있다"며 "미국 측은 쿠바 협상단에 디아스카넬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는 신호를 보냈고, 이후의 조치는 쿠바 측이 결정하도록 맡기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디아스카넬 사퇴 압박은 최근 시작된 양국 간 협상 과정에서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한 소식통은 트럼프 행정부의 사퇴 요구가 최후통첩 형태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생산적인 협상을 위한 길을 열어줄 긍정적인 조치로 제시됐다고 전했다. 미국은 그가 지도자로 남아 있는 한 어떤 협상도 이뤄지기 어렵다는 신호를 보냈다는 것이다.
미국과의 협상에 참여한 쿠바 측 인사들도 디아스카넬 대통령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에는 공감하고 있지만, 미국이 쿠바에 지시하는 모양새로 보이지 않으면서 변화를 이끌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디아스카넬 대통령은 지난 13일 "양국 간 현안을 대화를 통해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며 미국과 쿠바 간 협상이 시작됐음을 확인한 바 있다.
미국이 디아스카넬 축출에 집중하는 이유는 '강경파'로 분류되는 그가 미국이 원하는 방식의 경제 개혁을 추진할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디아스카넬은 2018년 라울 카스트로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했고, 2021년에는 공산당 제1서기에 올랐다. 명목상 카스트로의 후임으로 대통령직을 맡았지만,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쿠바의 경제 위기가 심화되고 '엑소더스(대탈출)'이 발생하면서 축출 대상이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또 이란 전쟁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올가을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가시적인 외교 성과가 필요한 상황이다. NYT는 "쿠바 지도부 최고위 인사의 축출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상징적인 정치적 성과가 될 수 있다"며 "이를 통해 그는 미국 국민에게 오랫동안 미국에 맞서온 좌파 정부의 지도자를 무너뜨렸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여전히 쿠바의 최고 권력 중개자 역할을 하고 있는 카스트로 가문 인사들에 대해 별도의 조치를 취하도록 압박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NYT는 이는 정권 교체(regime change)보다는 정권의 정책 순응(regime compliance)을 압박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 기조와도 일치한다고 평가했다.
미국은 전임 대통령 라울 카스트로의 손자를 차기 지도자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울 카스트로의 손자인 라울 기예르모 로드리게스 카스트로는 지난달 말 쿠바계 이민자 가정 출신인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과 비밀 회담을 가진 것으로 전해졌다. 한 소식통은 디아스카넬이 물러난 이후에도 로드리게스 카스트로가 정부 운영을 계속 이끌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다만 디아스카넬 축출을 위해 미국이 군사력을 사용할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쿠바는 무너질 준비가 된 것처럼 보인다.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왔다. 한편 그는 이날 백악관에서 "나는 쿠바를 점령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며 미국이 쿠바를 차지할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 대(對)쿠바 협상에 참여했던 리카르도 수니가는 디아스카넬 축출이 미국과 쿠바 관계를 "재설정(reset)"할 수 있는 완벽한 기회를 제공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내가 트럼프 입장이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며 "배의 선장은 배와 함께 가라앉는데, 지금 쿠바라는 배는 가라앉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디아스카넬이 급격한 변화를 시도하지 않을 인물이라는 이유로 대통령에 발탁됐으며 "그렇기 때문에 현재 미국과의 대치 상황에서 희생양으로 삼기 쉬운 인물"이라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디아스카넬 축출에만 만족할 경우 반발이 커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내 많은 보수 성향 쿠바계 망명자들이 쿠바의 전면적인 정치 체제 변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멕시코로 망명한 전 아바나대 사회학자 말레네 아소르 에르난데스는 "그를 물러나게 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공산당 정치국 전체와 쿠바 군부와 연계된 기업 가에사(GAESA)도 함께 권력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