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발(發) 지정학적 리스크가 전 세계 경제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에너지 가격이 급격히 요동치면서 가계 물가부터 국가 성장률까지 전방위적인 충격이 확산하는 모습이다. 국가별 에너지 자급률과 공급망 구조에 따라 '에너지 안보' 성적표가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현재 경제학자들은 세계 경제에 대해 두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전쟁이 조기에 종식돼 여름 내 에너지 가격이 정상화되는 낙관론과 공급망 차질이 장기화되는 비관론이다. 골드만삭스는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선을 돌파하면 세계 경제 성장률은 0.5%포인트(P) 하락하고, 인플레이션은 1%P 가까이 치솟을 것으로 전망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쟁 장기화 시 유럽과 중동은 심각한 타격을 입는 반면, 러시아는 뜻밖의 반사이익을 누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유럽과 중동, 큰 타격 불가피
보통 중동 산유국들은 고유가의 수혜자로 분류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라는 변수가 수출길을 막고 생산 감축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캐피털 이코노믹스는 충돌이 장기화될 경우 걸프 지역 경제 규모가 최대 15%까지 증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쟁이 단기간에 끝나더라도 걸프 지역 경제는 올해 최대 2% 위축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WSJ은 "이번 분쟁은 '안정적인 투자처'라는 걸프 지역의 이미지에도 타격을 주고 있다"면서 "이는 해외 투자 유치에 의존하는 사우디의 경제 개혁 프로젝트 '비전 2030'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라고 했다. 관광 산업 역시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관광 리서치 업체 투어리즘 이코노믹스는 올해 중동을 찾는 국제 관광객이 최대 27% 감소하며 약 560억 달러(약 83조원)의 관광 수입이 사라질 것으로 추정했다.
유럽 역시 에너지 가격 상승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에너지의 약 58%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글로벌 확보 경쟁 심화에 취약하다. 최근 한 달 사이 유럽 가스 가격은 50% 이상 폭등했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는 에너지 가격 상승이 유로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미국보다 3배가량 클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천연가스 가격이 메가와트시(MWh)당 300유로를 넘나들던 2022년 수준의 극단적 위기 재현 가능성은 낮다는 점이 불행 중 다행으로 꼽힌다. 당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은 극심한 에너지 위기를 겪었고, 유로존 물가가 10% 이상 치솟았다. 현재 천연가스 가격은 약 50유로 수준이다.
◇ 美, 방어력 커졌지만 인플레이션 숙제 여전
미국은 지난 10년간 셰일오일 생산 확대를 통해 '에너지 순수출국'으로 변모하며 유가 충격에 대한 맷집을 키웠다. 그러나 내부 충격은 피하지 못했다. 이란 전쟁 이후 미국 휘발유 가격은 약 20% 상승하며 가계 소비 여력을 옥죄고 있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는 유가가 배럴당 80달러선을 유지할 경우 미국 물가 상승률이 0.2%P 오르고, 성장은 0.1%P 낮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 러시아와 일부 산유국, 뜻밖의 '생명줄' 확보
이란 전쟁의 가장 큰 수혜자는 러시아다. 서방 제재로 판로가 막혔던 러시아산 원유는 중동발 공급 차질로 인해 다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유가가 러시아 재정 균형점인 배럴당 59달러를 크게 상회하면서 크렘린궁의 전쟁 자금은 더욱 두둑해질 전망이다. 캐나다와 브라질 등 여타 산유국들 역시 고유가에 따른 수출 증대로 경제 성장에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