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의회에서 700년 넘게 이어져 온 상원(House of Lords) 세습 귀족 의석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11일(현지시각) BBC와 스카이뉴스 등 영국 주요 매체에 따르면 이날 영국 상원은 세습 귀족 의결권을 완전히 폐지하는 내용이 담긴 상원 개혁 법안을 통과시켰다. 전문가들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단지 가문 혈통을 물려받았다는 이유로 국가 입법 과정에 깊숙이 개입하는 오랜 관행에 종지부를 찍는 중대한 결정이라고 평했다.
영국 의회는 선출직 하원과 비선출직 상원으로 짜인 양원제다. 상원은 하원이 제정한 법률을 심사하고 수정하며 보완한다. 행정부 정책을 견제하고, 심도 있는 토론을 이끄는 기능도 수행한다. 하지만 선거를 거치지 않고 구성된다는 근본적인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역사적으로 상원은 가문 직위를 대대손손 물려받은 남성 귀족과 성공회 고위 성직자들로만 채워진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1950년대 들어서야 정부가 추천하고 국왕이 임명하는 종신 귀족 제도가 처음 도입됐다. 이후 정계 은퇴자나 사회 각계 유명 인사가 종신 귀족으로 합류하면서 현재는 종신 귀족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구조로 변모했다.
현재 영국 상원 의원 의석 수는 800명을 훌쩍 넘는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비대한 입법 기관이다. 영국 국민이 직접 선출한 하원 의원 수가 650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기형적인 형태다.
노동당 정부는 1999년부터 대대적인 상원 개혁을 단행해 세습 귀족 600여 명을 대거 퇴출했다. 다만 당시 기득권을 잃게 된 귀족들의 거센 반발을 무마하고 제도적 충격을 완화하고자 92명에 한해 임시로 의석을 유지하는 예외 규정을 뒀다. 바로 이 92명이 이번 법안 통과를 계기로 상원을 영구히 떠난다.
세습 귀족 제도는 영국 내에서 현대 민주주의를 채택한 선진 국가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시대착오적 산물이라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았다. 부모가 누구인지, 어떤 가문 출신인지에 따라 국가 법을 만드는 막강한 권력을 평생 쥐는 상황은 평등 원칙과 민주주의 근간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지적이 거셌다.
특히 영국에서는 최근 피터 만델슨 상원의원이 미성년자 성착취 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과 과거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의혹이 불거져 지난 2월 불명예 사임하는 등 귀족들의 윤리적 일탈 행위가 도마 위에 오른 상태다. 시대에 뒤떨어지고 윤리 의식마저 해이해진 상원 조직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가 어느 때보다 높다.
상원에서 정부 입법 계획을 총괄하는 앤절라 스미스 상원 원내대표는 이번 법안 통과 직후 "상원이 양원제 체제에서 필수적이고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 누구도 단순히 물려받은 직위만으로 의회에 의석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세습 귀족이 남긴 개인적 기여도를 폄하하는 뜻이 아니라, 25년 전 의회가 합의한 민주적 원칙을 실현하는 절차"라고 덧붙였다. 영국 사회 전반에 퍼진 평등 의식이 신분제 기반의 낡은 정치 체제를 강하게 밀어낸 결과다.
반면 세습 귀족 제도가 오랜 세월 지녀온 순기능을 옹호하고 갑작스러운 퇴장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세습 귀족들은 다음 선거를 의식해 표퓰리즘에 영합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단기적인 여론이나 당파적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국가 장기적인 이익을 바라보는 냉철한 정책 검토가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보수당 소속 니컬러스 트루 상원 원내대표는 "수많은 세습 귀족이 과거 흠결도 있었으나 대부분 국가에 충실히 봉사하며 수천 건에 달하는 법률을 개선하는 데 실질적으로 이바지해 왔다"고 평가했다. 상원을 떠나게 된 데번 백작은 "우리 가문은 900년 동안 영국을 지켜왔다"며 "특권이 아닌 실력으로 다시 상원에 돌아오고 싶다"는 여운을 남겼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 가운데 영국 상원처럼 혈통에 기반한 세습 귀족이 입법부 의석을 자동으로 차지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부탄이나 에스와티니처럼 여전히 국왕 권한이 막강하거나 전통적인 부족장 제도를 입법 과정에 반영하는 일부 국가에만 예외로 남아 있다.
미국이나 독일처럼 상하원 양원제를 채택한 선진국은 상원 의원을 각 주를 대표하는 선출직으로 채우거나, 지방 정부가 파견하는 방식으로 정당성을 확보한다. 일본에는 과거 2차 세계대전 이전 영국 상원을 그대로 본뜬 귀족원이 존재했지만 패전 이후 제국 헌법 폐지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스페인이나 스웨덴 같은 유럽 입헌군주국 역시 국왕이라는 상징적 존재만 국가 원수로 유지할 뿐 입법 권한은 선거로 구성된 의회에 철저히 독점적으로 부여한다.
역사적인 상원 세습 귀족 폐지 법안은 향후 영국 찰스 3세 국왕 공식 재가를 거쳐 정식 법률로 최종 확정된다. 700년을 이어 상원 자리를 지켜 온 세습 귀족들은 오는 5월 무렵 현 의회 회기가 공식적으로 종료되는 시점에 맞춰 상원 회의장을 영구적으로 떠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