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 명 이상이 시청할 만큼 미국인들이 열광하는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 슈퍼볼 하프타임쇼에서 지난 8일(현지 시각) 라틴계 뮤지션 배드 버니가 스페인어로 공연을 펼치면서, 이를 둘러싼 미국 내 문화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하프타임쇼는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만 오를 수 있는 무대인데, 몇 년 전부터 이 무대에 선 아티스트들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이의 갈등 구도가 반복되는 양상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2026년 NFL 슈퍼볼 하프타임쇼 공연자 배드 버니 / AFP=연합

사실 NFL은 트럼프 1기 행정부 초기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을 의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2016년 8월,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49ers)의 전 쿼터백 콜린 캐퍼닉은 흑인이 백인 경찰의 총격으로 숨지는 사건이 잇따르자 이에 항의하는 의미로 경기 전 국민의례 때 무릎을 꿇는 시위를 벌였다. 이 행동은 '애국심 대 인종차별'이라는 구도로 번지며 거센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분노를 표출하자 NFL 구단들은 캐퍼닉과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사실상 리그에서 퇴출됐다. 이러한 상황에 반발해 미 유명 가수 리애나는 당시 하프타임 쇼 공연 제의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전방위적 비판을 받은 NFL은 팬층을 다양화하기 위해 힙합계 거물 제이지와 손을 잡았다. 하프타임 쇼는 2019년 NFL과 파트너십을 맺은 제이지의 엔터테인먼트 회사 락 네이션(Roc Nation)이 기획·제작하고 있다. 미 시사주간지 디 애틀랜틱 등에 따르면, NFL이 공연자를 최종 승인하긴 하지만 실제 선정 과정에서는 제이지의 영향력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 아티스트 가운데 한 명인 제이지와의 협업을 통해 NFL은 음악계의 지지를 확보했고, 더 젊고 다양한 관객층에 다가갈 수 있게 됐다.

락 네이션이 하프타임 쇼 제작을 맡은 첫해인 2020년 샤키라와 제니퍼 로페즈의 공연을 시작으로 ▲2021년 더 위켄드 ▲2022년 닥터 드레, 스눕 독, 에미넴, 메리 제이 블라이즈, 켄드릭 라마 ▲2023년 리애나 ▲2024년 어셔 ▲2025년 켄드릭 라마 ▲2026년 배드 버니 등 다양한 인종과 배경의 가수들이 무대에 올랐다. 당대 최고 가수들이 하프타임 쇼에 서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의 선정이 이례적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2010년대 하프타임 쇼 메인 공연자 가운데 흑인 아티스트는 블랙아이드피스(2011), 비욘세(2013), 브루노 마스(2014) 등 세 팀에 그쳤다. 이 점을 감안하면, 최근 인종적 다양성 확대에 제이지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프타임 쇼에 반(反) 트럼프 성향 인사가 오른 것도 공교롭게 락 네이션이 제작을 맡은 이후부터다. 2020년 하프타임 쇼 무대에 선 제니퍼 로페즈와 샤키라는 트럼프 1기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은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뉴욕의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가정 출신인 로페즈는 공연 마지막 순서에서 부모의 고향을 상징하는 깃발을 펼쳐 보였다. 또한 공연에 참여한 10대 소녀들이 새장처럼 보이는 구조물 안에 들어가 함께 노래를 부르는 장면도 연출됐다. 당시 외신들은 이 구조물이 이민자 부모와 자녀를 격리해 논란을 빚었던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 정책을 비판적으로 상징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듬해 하프타임 쇼 무대에 오른 에미넴은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하는 랩 곡을 발표해온 대표적인 반트럼프 인사로 꼽힌다. 에미넴과 함께 무대에 오른 스눕 독 역시 원래는 트럼프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비판해 온 인물이다. 그는 과거 트럼프를 향해 거친 표현을 사용하며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1기 행정부 말미인 2021년 1월 자신이 몸담았던 힙합 레이블 대표를 사면한 이후에는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이후 하프타임 쇼 공연자인 리애나, 어셔, 켄드릭 라마 등도 트럼프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거나 카멀라 해리스를 지지해 온 인물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리애나가 무대에 오르기 전부터 그를 두고 "모든 것이 나쁘고 재능이 없다"고 비난하며, 마가(MAGA) 진영 인사들과 함께 공연 취소를 촉구하기도 했다. 이들 공연자 섭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제이지 역시 오래전부터 트럼프 대통령과 공개 설전을 이어온 인물이다.

대부분의 NFL 구단주들과 임원들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마찰을 피하려 하지만, 하프타임쇼 공연자 만큼은 락 네이션에 일임하는 모양새다. 하프타임쇼 시청률은 NFL의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로저 구델 NFL 커미셔너는 지난 10월 "내가 듣는 음악을 고르려 한다면, 아무도 하프타임쇼에 오지 않을 것"이라며, 제이지가 하프타임 쇼가 음악 산업과 아티스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온라인 베팅 사이트 팬듀엘에 따르면 2027년 하프타임 쇼에 오를 유력한 후보로 마일리 사이러스에 대한 베팅률이 가장 높았다. 마일리 사이러스는 지난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되면 미국을 떠난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인물이다. 이외에도 흑인 여성 래퍼 카디비,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테일러 스위프트 등도 유력 후보로 거론된다. 이들 역시 지난 대선 과정에서 민주당을 공개 지지한 인물로, 누가 하프타임쇼 공연자로 확정되든 트럼프 대통령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