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국방부가 100년 넘게 이어온 스카우트(Scouting America·구 보이스카우트)와 혈맹 관계를 단절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번 조치는 스카우트 조직이 지나치게 정치적 올바름(PC·Political Correctness)을 추구하며 본연의 가치를 잃었다는 판단에서 비롯됐다. 일부 전문가들은 단순한 지원 중단을 넘어 미국 사회를 지탱해 온 군(軍)과 시민사회 연결고리가 끊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뉴스위크, 더힐 등 현지 유력 매체들이 26일(현지시각) 입수해 보도한 국방부 내부 메모에 따르면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의회에 보낼 보고서 초안에서 "스카우트가 더 이상 능력주의(meritocracy)를 따르지 않는다"며 "소년들을 위한 공간이 아닌, 소년들을 공격하는 조직으로 변질됐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헤그세스 장관은 2019년 스카우트가 여학생 가입을 전면 허용하고, 최근 조직 명칭에서 '보이(boy)'를 떼어내 '스카우팅 아메리카'로 리브랜딩한 점, 그리고 다양성과 형평성·포용성(DEI)을 강조하는 정책 기조가 전통적인 남성적 가치관이나 군사적 규율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는 메모에서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지지했던 스카우트 조직이 더 이상 미국 소년들의 미래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이번 조치가 단순한 스카우트 관련 예산 삭감이 아니라, 미국 내에서 치열하게 벌어지는 문화 전쟁(culture war) 전선을 국방 정책으로 확대한다는 의미다.
한국에서 스카우트는 야영 활동을 하는 청소년 단체 정도로 인식되지만 미국에서 스카우트는 '예비 시민 학교' 수준으로 각별한 위상을 자랑한다. 1910년 창설된 이래 115년 동안 미국인 약 1억 3000만 명이 스카우트 프로그램을 거쳐 갔다.
닐 암스트롱을 포함해 달을 밟은 우주비행사 12명 중 11명이 스카우트 출신이고, 존 F. 케네디, 제럴드 포드, 빌 클린턴처럼 인기가 많았던 역대 대통령 다수가 스카우트 활동을 했다. 포드 대통령은 "스카우트 원칙 덕분에 나는 더 나은 해군 장교, 더 나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스카우트 단원은 미국 사회에서 성실함과 리더십을 보증하는 '스펙'으로 통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1기 행정부 시절 2017년 잼버리 대회 연설에서 "미국에 보이스카우트보다 더 나은 시민은 없다"고 치켜세운 바 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내각 구성원 중 10명이 스카우트 출신임을 자랑했다.
여전히 미군과 스카우트는 인적 연결고리가 깊다. 존 펠런 미 해군장관에 따르면 해군 장교 후보생 중 약 3분의 1은 스카우트 경험이 있다. 또 미 공군사관학교 졸업생 중 20%가 스카우트 출신이라는 통계도 있다.
하지만 헤그세스 장관은 현재 스카우트가 '좌파에 의해 장악됐다'고 보고 관계에 완전히 마침표를 찍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스카우트는 2013년 동성애자 청소년 가입을 허용했다. 2015년 동성애자 성인에게도 지도자 문호를 열었다.
급기야 2017년에는 트랜스젠더에게 단원 자격을 부여해 보수 기독교계 반발을 샀다. 당시 최대 후원 조직이었던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몰몬교)는 결국 2019년 스카우트와 관계를 완전히 끊었다.
2020년 스카우트는 수십 년간 누적된 아동 성추행 사건으로 수만 건에 달하는 소송을 당했다. 피해자 수는 8만 명 이상으로, 194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70여년에 걸쳐 발생한 사건들이 법적 절차를 통해 밝혀졌다. 이후 본부(연맹)은 파산 보호 신청을 하고, 24억 달러(약 3조 5200억 원) 규모 배상 합의를 하는 등 도덕적 타격을 입었다.
미국 매체들은 "스카우트가 법원 감독 아래 단체를 운영하면서, 피해자들과 합의를 해왔다"며 "논란이 있는 단체에 국가 차원에서 상당한 후원을 하기 실질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메모 속에 적힌 조치에 따르면 국방부는 우선 4년마다 웨스트버지니아주(州) 서밋 벡텔 예비군 훈련장에서 열리는 대규모 야영 대회 '내셔널 잼버리(National Jamboree)'에 대한 지원을 끊는다. 1937년 워싱턴 D.C.에서 열린 첫 잼버리 이후 미군은 이 행사에 막사, 의료 시설, 통신 장비, 헬기 등을 무상 지원했다. 공군은 행사 기간 전투기를 동원해 항공 쇼를 선보였다. 잼버리는 단순한 스카우트 행사가 아니라 미군에 대민 지원 훈련 기회이자, 보이 스카우트 단원 애국심을 고취시켜 잠재적 입대 자원을 확보하는 핵심 창구였다.
해외 주둔 미군 기지 내 스카우트 활동도 금지된다. 미군은 독일 람슈타인 공군기지나 일본 요코스카 해군기지 같은 해외 파병지에서 스카우트 활동을 허용해왔다. 이 지역에서 스카우트는 군인 자녀들이 낯선 환경에 적응하고 유대감을 형성하는 유일한 커뮤니티 역할을 해왔다. 공영방송 NPR은 세 자녀를 둔 이라크전 참전 용사를 인용해 "우리는 루이지애나에서 알래스카로, 독일로, 다시 텍사스로 끊임없이 이동했지만 어느 기지에나 스카우트가 있어 아이들이 적응할 수 있었다"며 "국방부가 군인 가족보다 정치적 메시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듯 하다"고 전했다.
미군은 그동안 보이 스카우트 최고 등급에 해당하는 '이글 스카우트(eagle scout)'를 받은 단원이 미군에 입대할 경우 특혜를 부여했다. 이글 스카우트는 응급처치, 수영, 캠핑 같은 여러 분야에서 공로 훈장을 21개 이상 받고 6개월 이상 부대장 이상 리더십 직택을 맡아야 받을 수 있다. 미군은 이 등급 단원에게 훈련병(E-1)이 아닌 이병(E-2)이나 일병(E-3) 계급을 부여하고 월급도 더 주는 인센티브 제도를 운영했다. 그러나 이번 조치로 이 또한 폐지 수순을 밟게 된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단순한 예산 절감 차원을 넘어 미국 내 이념 갈등이 안보 영역으로 확장된 사례라고 분석했다. 국방부는 NPR 등 언론 문의에 "유출된 문서에 대해서는 확인해 줄 수 없으며, 결정 전 단계 사안"이라고 말을 아꼈다.
스카우트는 내년 여름 예정된 내셔널 잼버리를 이미 준비하고 있다. 국방부 지원 중단이 확정될 경우 스카우트 운영에 막대한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로저 크론 스카우팅 아메리카 최고경영자(CEO)는 성명에서 "스카우트는 당파성이 없으며 언제나 국가에 헌신하는 인재를 길러왔다"며 "능력주의가 사라졌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고, 스카우트 배지와 계급은 여전히 주어지는 게 아니라 획득하는 것(earned, not given)"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