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선거 제도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은 2026년 중간선거 승리를 위해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이라는 악수(惡手)를 꺼냈다. 남부 텍사스에서 시작된 노골적인 선거구 조작 시도가 중서부 미주리, 동부 메릴랜드 등 미 전역으로 번지고 있다.
3일(현지시각) 공화당이 장악한 미주리주 의회는 선거구 재획정을 위한 특별 회기를 시작했다. 마이크 키호 미주리 주지사는 민주당 텃밭인 캔자스시티를 3개 선거구로 쪼개는 내용을 담은 조정안을 제출했다. 캔자스시티는 세인트루이스와 함께 미주리를 대표하는 도시다. 미주리 전역이 공화당 강세지만, 유독 캔자스시티는 민주당 소속 이매뉴얼 클리버 하원의원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번 조정안은 클리버 의원 지역구인 이곳을 공화당 입맛에 맞게 나눠 최소 1석을 더 확보하려는 의도다.
클리버 의원은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당신들이 세울 수 있는 가장 역겨운 계획(as stinky a plan as you could have)"이라며 "이는 단순히 선거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침묵시키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그는 캔자스시티 공립학교 학군이 둘로 나뉘는 점을 지적하며 "과거 흑인 공동체를 의도적으로 갈라놓았던 고속도로 건설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공화당 공세에 민주당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민주당 텃밭 캘리포니아와 뉴욕, 메릴랜드 등에서 '보복 게리맨더링'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공화당 하원의원 5~6명을 낙선시킬 수 있는 선거구 조정안을 주민투표에 부치는 방안을 승인했다.
이날 메릴랜드주 민주당 소속 클래런스 램 주 상원의원은 주 내 유일한 공화당 하원의원인 앤디 해리스 의원 지역구를 없애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그는 폴리티코 인터뷰에서 "나 역시 이런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서도 "공화당이 우리를 희생시키면서 극단적인 도구를 사용하려 한다면, 우리는 물러서서 그들이 우리를 짓밟게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게리맨더링'은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에게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기형적으로 획정하는 행위다. 유권자 의사를 왜곡해 투표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대표적인 행위로 꼽힌다.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10년마다 실시하는 인구 총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선거구를 재획정하는데, 최근 공화당은 이 원칙을 무너 뜨리고 선거구를 마음대로 조정하려 하고 있다.
이번 선거구 전쟁은 공화당 텃밭 텍사스에서 시작했다.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는 최근 공화당에 연방 하원 의석 5석을 더 안겨줄 수 있는 선거구 재획정 법안에 서명했다. 이는 "텍사스에서 다섯 석이 더 필요하다"는 트럼프 대통령 요구에 따른 조치다. 법안 통과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민주당 주 의원 50여 명이 표결을 막기 위해 의사당을 집단 탈출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고, 공화당 소속 주지사는 이들에게 체포 위협까지 가하며 법안을 밀어붙였다. 전문가들은 다른 주에서도 비슷한 수준의 대립이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미국 정치를 양분하는 두 당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 극한 대결로 치달으면서 미국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MSNBC 방송은 전문가를 인용해 "공화당은 책임감 때문이 아니라 권력을 유지하고 대통령에 대한 책임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게리맨더링을 추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유권자가 투표하기도 전에 승리를 보장하는 이런 행태는 미국인들이 실제로 원하는 것과 상관없이 공화당이 향후 10년간 권력을 유지하게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