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국민연합(RN)이 프랑스 1차 조기 총선에서 범여당과 좌파 연합을 앞지르고 1위를 차지했다. 프랑스 근현대 정치사에서 극우 세력이 총선에서 최다 득표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직 2차 투표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한때 비주류로 취급받던 극우의 돌풍 자체가 충격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프랑스 극우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의원. /AFP

◇ 극단주의 ‘왕따’ 정당을 바꾼 마린 르펜

프랑스 극우 정당은 1972년 마린 르펜의 부친인 장 마리 르펜이 창당한 국민전선(FN)으로 시작됐다. FN은 반(反)이민, 반유럽연합(EU), 반공주의 정책을 내세우는 등 극단적 성향을 보이며 비주류로 취급받았었다. 반유대주의나 인종차별 성향도 노골적으로 드러냈는데, 초기 당원 중에는 독일 나치 부역자 등 20세기 유럽 제국주의·전체주의 사상에 물든 사람도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사실상 ‘그들만의 세상’을 구축하며 비주류로 취급받던 FN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장 마리 르펜의 막내딸인 마린 르펜이 입당한 이후부터다. 2002년 대선 2차 투표에 진출하면서 유권자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마린 르펜은 2011년 FN의 당 대표 자리에 오르면서 존재감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마린 르펜은 FN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급진적 인사들을 정리했고, 이 과정에서 아버지인 장 마리 르펜까지 영구 제명하는 결단력을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두둔하는 발언을 일삼던 장 마리 르펜을 축출하며 탈(脫) 악마화 전략을 짠 것이다. 2018년에는 당명도 국민연합(RN)으로 바꿨다.

마린 르펜은 당 정책에도 변화를 꾀했다. 세금 감면, 복지 확대, 프랑스 경제 보호 등 포퓰리즘적 정책을 내세웠으며 반이민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이를 인종차별적 접근이 아닌 국가 안보, 국가 정체성 보호 차원으로 접근했다. 이런 그의 전략은 지난 2015년 파리 테러 등으로 사회적 불안이 커지면서 지지를 얻게 됐다. 마린 르펜은 법학을 전공했고 젊은 시절 변호사로 일했었다.

조르당 바르델라 프랑스 극우 국민연합(RN) 당대표. /AFP

◇ MZ세대 맞춤형 젊은 피 수혈해 지지율 높여

마린 르펜은 기존의 구세대가 차지했던 자리들을 젊은 정치인들로 대체했다. 2022년에는 20대 젊은 정치인 조르당 바르델라를 당 대표 자리에 앉혔다.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바르델라 대표를 ‘자수성가한 젊은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로 만들어 ‘반이민·반무슬림 극우 정당’이라는 RN의 인식을 완화하는 데 활용했다.

바르델라 대표는 2012년 대선에 도전한 르펜을 보고 RN의 전신인 FN에 입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세실 알뒤 스탠퍼드대 교수는 “바르델라는 마린 르펜의 창조물”이라면서 “그는 르펜에 의해 만들어졌고, 매우 충성스럽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하나의 대열”이라고 말했다. 1995년생인 바르델라 대표는 훤칠한 외모와 깔끔한 언변으로 프랑스 청년층의 표몰이에 나서고 있다. 이번 1차 투표에서 18~24세 유권자의 48%, 25~34세 유권자의 38%가 RN을 찍는 등 젊은 층의 지지가 압도적이었던 데는 바르델라의 공이 컸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특히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영리하게 잘 활용하며 ‘MZ세대 맞춤형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의 틱톡 팔로워 수는 170만명이 넘는다.

조기 총선이 끝나고 총리직에 오르면 프랑스 역사상 최연소이자 첫 20대 총리가 된다. 현재 역대 최연소 총리는 올해 1월 34세 나이로 취임한 가브리엘 아탈 현 총리다.

◇ 극우 돌풍, 2027년 대선까지 이어질까

일각에서는 바르델라 대표가 총리직에 오르면 마린 르펜이 이를 발판으로 2027년 대선에 도전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앞서 마린 르펜은 2017년과 2022년 대선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경쟁한 바 있다. 마린 르펜은 2017년 마크롱 대통령과 겨룬 대선 1차 투표에서 21.3%, 2차 투표에서 33.9%를 얻었다. 5년 뒤 마크롱 대통령과의 재대결에서는 1차 투표에서 23.2%, 2차 투표에서 41.5%를 얻으며 격차를 좁혔다.

프랑스 극우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왼쪽) 의원이 지난달 21일 파리 엘리제궁에서 회담 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AFP

현재 RN은 반이민 정책과 보호무역 등을 내세우고 있다. RN은 프랑스에 거주하는 외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18세가 되면 자동으로 프랑스 국적을 받는 출생시민권제도의 폐지를 공약. 또한 불법체류자에게 의료서비스나 사회복지 혜택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전 국민 부가가치세 인하와 39세 이하에 대한 세금 감면 공약을 내세우며 서민층도 공략하고 있다.

오는 7일 2차 투표 이후 최종 결과가 나오면 마크롱 대통령은 총리를 임명하게 된다. 현재 기세대로라면 RN이 1당을 차지할 확률이 높다. 그렇게 된다면 프랑스에서는 27년 만에 역대 4번째 ‘코아비타시옹(Cohabitation·동거 정부)’이 나온다. 총리 임명이 대통령 권한이더라도 내각 불신임권을 가진 의회 다수당이 반대하는 총리를 임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통상 총리는 다수당 대표가 차지한다. 프랑스 정부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를 혼합한 이원집정부제로 대통령과 총리가 권한을 나눠 가진다.

한편, RN이 승리할 경우 프랑스 재정 적자가 더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커진다. 마크롱 대통령은 재정 고갈을 이유로 연금을 지급받는 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변경했었는데, RN은 오히려 연령을 60세로 낮추자고 제안했다. 브루노 르 메르 프랑스 재무장관은 “르펜의 RN이 과거 지지했던 정책은 수천억 유로의 비용이 들 것”이라며 “르펜의 정당이 승리할 경우 프랑스가 부채 위기에 빠질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르 메르 장관은 “극우 정당의 승리는 영국이 리즈 트러스 전 총리 시절 겪었던 혼란과 유사한 상황을 프랑스에서 재현할 수 있다”라고 했다.리즈 트러스 전 영국 총리는 지난 2022년 대규모 감세안을 발표했다. 이후 대출 금리가 급등하고 파운드화가 폭락하면서 금융 위기론이 커지자, 그는 44일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