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현지 시각) 전용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러시아 민간 용병업체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분류돼 왔다.
그는 푸틴의 고향이기도 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 출신으로, 지난 1981년 강도 등 범죄로 9년간 복역한 후 고향에서 푸틴 대통령이 즐겨 찾는 식당을 운영했다. 이후 그는 수도 모스크바까지 진출, 크렘린궁에서 열리는 각종 만찬과 연회를 도맡으면서 '푸틴의 요리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프리고진은 지난 2014년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서 친러 분리주의 세력과 우크라이나 정부군 간 충돌이 벌어졌을 때 러시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바그너그룹을 설립했다. 이후 바그너 그룹은 '푸틴의 살인 용병'으로 불리며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에 러시아군 대신 개입하면서 세력을 키워왔고, 프리고진은 '푸틴의 더러운 칼'이라는 별명을 오명을 썼다.
러시아에 무장 반란을 일으킨 바그너그룹은 약 5만명의 전투원을 보유한 민간 용병 기업이다. 바그너그룹은 지난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모병에 어려움을 겪자, 죄수들을 대거 전투 요원으로 채용했다.
프리고진이 이끄는 바그너 그룹은 같은 해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 병합 과정에서 벌어졌던 전쟁과 시리아·리비아·수단 등 각국에서 발생하는 분쟁에 러시아군을 대신해 개입했다. 세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 등 잔학한 행위로 악명이 높았으나 프리고진은 이를 부인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전쟁이 한창이던 작년 9월 프리고진은 성명을 내고 바그너 그룹을 창설한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바그너 그룹은 우크라이나 전쟁 최대 격전지였던 동부 바흐무트에서 러시아의 공격을 주도했다. 바그너 그룹 용병 5만명가량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투입됐고, 이 중 4만명이 러시아 교도소로부터 모집된 죄수들이라고 서방 정보 당국자들은 추정했다.
올 들어 프리고진은 텔레그램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바그너 그룹의 활약을 과시하는 한편 러시아 측 군부 인사들의 무능과 비협조적인 태도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지난 5월엔 군 수뇌부를 겨냥해 '인간말종' '지옥에서 불탈 것'이라는 등의 강도 높은 발언을 했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이 논란을 진압하려 6월 10일 모든 비정규군을 상대로 "러시아 국방부와 정식 계약을 체결하라"고 지시했지만, 프리고진은 계약을 거부하고 같은 달 23일 오히려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러시아 군부가 우리의 후방 캠프를 폭격했고 많은 바그너 동지들이 죽었다"는 주장과 함께였다.
러시아 본토로까지 진격하며 반란의 수위를 높인 프리고진을 두고 푸틴 대통령은 "가혹하게 대응하겠다"며 반역 행위로 규정했다. 반란 사태는 푸틴의 우군인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의 중재로 프리고진이 벨라루스로 철군하는 조건으로 그와 병사들의 처벌을 면해줄 것을 합의하면서 약 36시간 만에 일단락됐다.
신변 보장 약속을 받은 프리고진은 무장 반란 약 닷새 뒤에 푸틴과 면담했고, 7월 말에는 러시아와 아프리카 간 정상회담이 열렸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집권 기간 정적과 배신자들을 제거하며 권력을 공고히 해 온 푸틴이 결국엔 프리고진까지 제거할 것이라는 전망도 적지 않았다. 러시아 국영 로시야1방송은 지난달 경찰 특수부대가 프리고진이 소유한 사업체의 사무실, 저택을 급습하는 모습을 보도하면서 "프리고진에 대한 수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전한 바 있다.
프리고진은 지난달 27일 러시아·아프리카 국가 정상회의가 열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나타나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대표단을 만나는가 하면, 지난 21일에는 아프리카로 추정되는 한 사막에서 위장복 차림에 소총을 들고 서있는 모습을 공개하는 등 건재를 과시해 왔다.
한편 CNN 등 외신에 따르면 러시아 재난 당국은 23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던 엠브라에르 레가시 제트기가 트베리 지역의 쿠젠키노 주변에 추락했다"라며 "초기 조사 결과 승무원 3명을 포함해 탑승한 10명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전했다.
러시아 항공 당국은 "탑승자 명단에 프리고진의 이름이 포함돼 있다"고 확인했고, 이후 "프리고진과 드미트리 우트킨이 해당 비행기에 탑승했다"고 밝혀 프리고진의 사망 사실을 확인했다. 그와 함께 숨진 드미트리 우트킨은 프리고진의 최측근으로서 프리고진과 함께 바그너그룹을 설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친(親)바그너 텔레그램 채널 그레이존도 프리고진이 이번 사고로 숨졌다고 밝혔다. 그레이존은 러시아군 방공망이 바그너그룹의 전용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일부 현지 매체들도 전용기 이륙 후 30분도 안돼 방공망에 요격됐다고 보도했다.
한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프리고진이 탑승한 비행기가 추락해 전원 사망했다는 보도에 대해 "놀랍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프리고진 사망 배후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있을 수 있다고도 언급했다. 23일 CNN에 따르면 이날 휴가차 네바다주(州) 타호 호수에 머무는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에서 발생한 비행기 추락 사고와 관련해 보고 받았다.
그는 프리고진의 비행기 추락 사고에 대해 묻는 취재진 질문에 "전에 내가 한 말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난 '내가 (프리고진이라면) 무엇을 탈지 조심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난 놀랍지 않다"고 덧붙였다. 앞서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프리고진의 반란과 관련 그의 신병을 묻는 질문에 "내가 프리고진이라면 먹는 걸 조심할 것이다. 메뉴를 예의 주시하겠다. 농담일 수도 있지만 누가 알겠나"라며 독살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배후 가능성에는 "러시아에서 푸틴이 배후에 있지 않은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다만 나는 답을 알 만큼 충분히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에이드리언 왓슨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도 트위터에 "우리도 보도를 봤다"며 "만약 (사실로) 확인돼도 누구도 놀랄 일이 아니다"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