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인사관리 컨설팅 회사인 챌린저 그레이 앤드 크리스마스(CG&C)는 최근 보고서에서 지난달 미국에서 해고된 근로자 중 3900명의 해고 원인을 ‘인공지능’(AI)으로 명시했다. AI로 인한 인력 감축은 폐업(1만9598명)과 시장 상황(1만4617명), 비용 감축(8392명) 등에 이어 총 17개 항목 중 일곱 번째로 많았다. 고용 동향 보고서에서 인력 감축 원인으로 AI가 직접 언급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싱가포르는 국토의 약 30%가 해발 고도 5m 이내의 저지대다.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싱가포르 강 하구에 위치한 클락키(Clarke Quay)의 야경. /싱가포르 관광청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인공지능(AI) 열풍으로 일자리 축소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관련 기술 규제를 위한 국제 공조를 주장하는 의견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하지만 1인당 국내총생산(GDP) 세계 5위(약 7만2800달러, 지난해 세계은행 기준)의 아시아를 대표하는 선진국이자 금융허브인 싱가포르는 AI 기술 발전이 가져올 긍정적인 변화에 더 초점을 맞추는 모양새다.

싱가포르 정보통신미디어개발청(IMDA)의 리완시에(Lee Wan Sie) AI 및 데이터 담당 디렉터(이사)는 지난달 19일(현지 시각) 공개된 CNBC 인터뷰에서 “현재로서는 AI 규제를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잘라말했다. IMDA는 싱가포르의 통신 및 미디어 부문의 성장과 규제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로렌스 웡 싱가포르 부총리 겸 재무장관은 지난달 6일 열린 ‘아시아 테크 싱가포르2023′ 행사에서 AI 기술이 가져올 변화에 대해 “직업의 성격이 변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파괴적 혁신도 증가할 것”이라면서도 “생산성 향상으로 새로운 업무와 일자리가 생겨날 것”으로 내다봤다.

아시아 테크 싱가포르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정보통신기술(ICT) 전시회로, 각국 정부와 글로벌 기업 대표들이 모여 미래 기술을 논의하는 장이다. 웡 부총리는 싱가포르 중앙은행인 싱가포르 통화청(MAS)의 차기 의장으로 최근 낙점 받았다. 임기는 오는 8일 부터다.

◊ 첨단 엔비디아 기술로 몇 달씩 걸리던 데이터 분석 며칠만에 완료

싱가포르는 AI 분야에서 지난 몇 년간 세계가 주목할만한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영국 데이터 분석업체 토터스인텔리전스가 매년 조사해 발표하는 글로벌 AI 지수’(The Global AI Index) 순위에서 싱가포르는 올해 전 세계 주요 62개국 중 미국과 중국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싱가포르와 영국, 캐나다에 이은 6위였다.

2023년 글로벌 AI 지수 순위. /그래픽=손민균

글로벌 AI 지수는 지난 2020년 처음 발표, 세계경제포럼(WEF) 등에서 소개되며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다.이 지수는 ▲인재(Talent) ▲인프라(Infrastructure) ▲운영환경(Operating Environment) ▲연구(Research) ▲개발(Development) ▲정부정책(Government Strategy) ▲상업화(Commercial) ▲규모(Scale) ▲강도(Intensity) 등을 세부적으로 나눠 평가하고 종합 순위를 매긴다. 올해 순위에서는 생성형AI 개발 기술력 및 잠재력에 대한 평가도 처음 반영됐다.

첫 조사였던 2020년 10위를 차지했던 싱가포르는 불과 3년 만에 순위가 일곱 계단이나 오르면서 미국과 중국의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싱가포르의 AI 연구개발(R&D) 지출은 미국의18배에 달한다. 면적이 서울보다 조금 큰 도시국가인 싱가포르에는 현재 약 270개의 AI 스타트업이 활동 중이다.

AI 기술의 선용(善用)과 관련해 싱가포르 정부가 각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 중 하나는 기후위기 대응이다. 싱가포르는 국토의 약 30%가 해발 고도 5m 이내의 저지대다.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싱가포르 금융중심가와 공항, 마리나베이 샌즈 호텔과 세계 최초로 물 위에 떠 있는 애플스토어 등 랜드마크 건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침수 취약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극에서 바다로 떨어져 나오는 얼음 덩어리. 남극 얼음이 녹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해수면 상승도 빨라지고 있다.

유엔 산하 국제 조직인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지난해 8월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00년간 지구의 평균 해수면은 20cm 상승했다.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상승 속도다 1901년~1971년 사이 전 세계 해수면은 연평균 1.3mm 상승했는데, 2006년~2008년 사이에는 3.7mm로 세 배 가까이 빨라졌다.

1989년~2021년 33년간 해수면 상승 분포도. /해수부 제공

기후위기 대응 능력 향상을 위한 싱가포르 정부의 절박한 노력에 세계 최고 AI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도 힘을 보탰다.

엔비디아는반도체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팹리스 기업이다. 주력 제품은 게임기와 가상자산 채굴, 인공지능(AI) 등에 쓰이는 그래픽 저장장치(GPU)다. 지난 달에는 전세계적으로 반도체 기업 중 최초로 시가총액 1조 달러(약 1300조원)를 돌파했다. 전체 기업 중에서는 애플과 아마존, 알파벳, 테슬라, 메타, 마이크로소프트(MS)에 이어 미국 기업 중 일곱 번째다.

엔비디아의 세계 AI 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 점유율은 90%에 달한다. 중국의 반도체 전문가들도 AI 반도체 분야에서 엔비디아를 대체하기 어렵다고 시인할 만큼 독보적인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엔비디아는 싱가포르에서 영국 뉴캐슬대가 싱가포르 캠퍼스에서 운영하는 기후 관련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구름과 온실가스, 오염물질 등을 포함하는 대기의 화학 조성과 관련 변화를 연구한다. 방대한 데이터를 AI와 가속 컴퓨팅 기술로 모델링하고 분석해 기후 변화 예측의 정확도를 높이고, 효과적인 대응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매우 복잡한 작업이다.

엔비디아는 지난해 9월부터 자사의 첨단 기술력을 해당 연구에 접목할 수 있도록 지원해 왔다. 지원 기간은 4년이다. 싱가포르경제개발청(SEDB)도 해당 연구에 자금을 대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에 있는 엔비디아 본사.

연구를 이끌고 있는 뉴캐슬대 싱가포르 캠퍼스의 친쳉샹 교수를 지난달 22일 싱가포르공대(SIT) 캠퍼스에 있는 연구실에서 만났다. 뉴캐슬대는 2009년부터 SIT와 공동 학위 과정을 운영 중이다.

싱가포르 출신인 친 교수는 ‘아시아의 MIT’로 불리는 세계적인 명문 공대인 싱가포르 난양공대(NTU)에서 응용제어계측공학(Applied Control Engineering)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이 학교에서 AI 모델링과 시뮬레이션 연구를 이끌고 있다.

그는 연구를 진행하며 경험한 엔비디아의 기술력에 대해서는 “최소 300개의 매개변수와 조단위 정보를 몇 일 만에 분석한다. 예전엔 몇 달씩 걸리던 작업”이라며 놀라워 했다.

여러 나라에서 자율주행차와 생체의학 등 다양한 주제로 AI 관련 투자를 진행 중인 엔비디아가 싱가포르에서 기후를 주제로 잡은 배경에 관해서는 “언젠가 엔비디아 관계자가 찾아와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 했다. 싱가포르가 기후변화에 취약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기후위기 대응은 싱가포르 정부가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분야기도 해서 그쪽으로 방향을 잡게 됐다”고 설명했다.

친샹쳉 교수가 지난달 22일 뉴캐슬대 싱가포르 캠퍼스의 사무실에서 자신의 연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용성 기자

친 교수는 진행 중인 연구에 대해 “정교하게 모델링한 지구와 대기를 촘촘한 그리드로 분할해 구성 물질과 움직임을 분석해야 하는 만큼 물리학과 화학까지 결합해야 하는 작업”이라며 “데이터가 축적 될수록 분석과 예측의 정확도가 높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급격한 기후 변화는 날씨 예보의 정확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기도 하다. 쳉 교수에 따르면, 현재 싱가포르의 일기예보 정확도는 높게 잡아도 50%~60% 정도이며, 그나마 1~2일 정도 뒤의 날씨만 높은 정확도로 예측 가능하다. 그는 “날씨 관련 정보를 보다 정확하게 만들고 투명하게 개방해 모두가 쉽게 이용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기후변화 대응은 엔비디아의 공동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인 젠슨 황이 특별히 공을 들이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5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지구 가상화 엔진(EVE) 이니셔티브를 위한 서밋의 기조연설자로 나서 기후 연구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달성하는 데 AI와 가속 컴퓨팅이 도움을 줄 것이라며 기후 연구자들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뤄야 할 ‘3가지 기적’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지난 5월 29일에는 대만 타이베이 국제컴퓨터 전시회인 컴퓨텍스(COMPUTEX)에 참가해 발표 중인 젠슨 황.

첫 번째 기적은 기후를 불과 몇 제곱킬로미터 구간 단위의 촘촘한 구간에 발생하는 기후 현상을 신속히, 높은 해상도로 구현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AI 기술로 기후 시스템의 움직임을 분석해 가능한 모든 미래의 변화를 빛의 속도로 충실히 파악하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이 모든 데이터를 ‘엔비디아 옴니버스’(엔비디아의 실시간 개방형 3D 디자인 협업 플랫폼)를 통해 상호적으로 시각화해 정책 입안자, 비즈니스, 기업 또는 연구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는 “더 나은 기후 모델링을 위해 컴퓨팅의 한계를 극복하고, 전 지구적-지역적 기후 상태를 연구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과 기술을 모색해 미래 세대에 (기후변화) 완화와 적응의 소식을 전하고,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용감하게 나아가는 것이 기후 연구자들의 임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