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루스-폴란드 국경에서 벌어진 난민 월경(越境) 사태로 벨라루스를 지원하는 러시아와 폴란드가 속한 서방 진영 간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최근 벨라루스·프랑스 정상 등과 연이어 접촉하며 '중재'에 나섰지만, 유럽연합(EU)과 미국은 벨라루스에 대한 추가 제재를 구체화하며 견제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15일(현지 시각) 러시아 크렘린궁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전날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과 대화를 나눴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두 정상이 EU의 추가 제재 언급에 반발해 루카셴코 대통령이 러시아산(産) 가스가 유럽으로 향하는 수송관을 막겠다고 위협했던 사안에 대해 논의했다고 전했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지난 11일 "우리는 가스 공급을 통해 유럽을 도와주고 있는데도 그들은 국경을 폐쇄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며 "가스를 끊으면 어떨 것 같은가, 그러니 나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등 다른 생각없는 사람들에게 '말하기 전에 생각할 것'을 권한다"고 밝힌 바 있다. 푸틴 대통령은 그로부터 이틀 만인 지난 13일 "루카셴코 대통령과 두 차례 대화했지만 가스 공급 중단까지 꺼낼 줄은 몰랐다"며 "그래서 좋을 것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루카셴코와 대화하겠다. 아마도 그는 잠시 화가 나서 그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도 전화 회담을 가진 것으로 전해졌다. 프랑스 엘리제궁은 푸틴 대통령이 마크롱 대통령과 벨라루스-폴란드 국경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엘리제궁은 또 2시간 가까이 이어진 이번 회담에서 두 정상이 난민들에 대한 인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데에도 동의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양측은 이후 구체적인 조치는 발표하지 않았다.
루카셴코 대통령도 같은 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대행과 50여분간 통화했다. 이날 통화는 특히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로 불리는 루카셴코 대통령이 지난해 8월 6선에 성공한 이후 서방 국가 정상과 가진 첫 접촉이란 점에서 주목받았다. 독일 정부 측 대변인은 그러나 양측이 의견 교환을 지속하는 데에는 합의했지만 상황을 타개할 만한 신호는 없었다고 밝혔다.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미온적인 태도에 상황은 점차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EU는 당초 예고했던 대(對)벨라루스 추가 제재를 수일내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EU는 벨라루스가 중동 난민들의 자국 입국과 뒤이은 유럽행(行)을 의도적으로 조장하거나 적어도 방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난민 사태가 EU를 압박하고 분열시키기 위해 러시아가 기획한 '하이브리드 공격'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사이는 각별하다. 지난 9월에는 양측이 두 나라를 통합하는 '연합국가(Union State)' 창설을 위한 28개 로드맵에 합의하기도 했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지난 13일에도 "사거리 500㎞에, 재래식 탄두와 핵탄두를 모두 탑재할 수 있는 러시아의 이스칸데르 미사일 시스템이 벨라루스에 배치되기를 바란다"며 푸틴 대통령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동생이 다치게 놔두지 않을 형이 내 뒤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도록 해달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조셉 보렐 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이날 "(벨라루스에 대한) 5차 제재가 합의돼 수일 내로 마무리될 것"이라며 "이번 제재는 (벨라루스) 개인과 기업에 가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AP통신 등은 EU가 향후 자산 동결이나 여행금지 제재 대상 항공사와 여행사 명단을 확정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독일 포쿠스온라인에 따르면, 벨라루스 정부가 운영하는 최대 여행사인 센트르쿠어오르트는 지금도 난민들을 대상으로 벨라루스행 항공권과 폴란드 국경까지 안내 서비스를 묶은 패키지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도 벨라루스에 대한 제재를 마련하겠다고 시사하면서 사태는 새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네드 프라이스 미 국무부 대변인은 14일 성명을 내고 "루카셴코 정권이 하는 조치들은 안보를 위협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행위"라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 근처에 병력을 늘리는 행위에 대한 시선을 돌리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비판했다.
러시아가 이달 초 우크라이나와 인접한 러시아 서남부 국경 지역인 브랸스키와 쿠르시키에 9만여명의 병력을 파견한 것과 벨라루스의 '난민 몰아넣기'가 연관이 있다는 지적이다. 우크라이나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 반도 강제 합병 이후 친(親)러시아 분리주의 세력과 정부군 간의 내전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프라이스 대변인은 그러면서 "민주주의와 인권, 국제 규범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을 일삼는 루카셴코 정권에게 계속해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 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 이날 러시아의 군사력 증강에 맞서 유사시 우크라이나의 편에 서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러시아가 가까운 시일 내에 우크라이나 침공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국의 경고에는 "러시아가 곧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긴장을 증가시키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며 "우리가 직면한 도전에 대해 현실적일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