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트럼프'로 불리는 극우 방송인이 6개월 앞으로 닥친 대선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정치 경력도 없고, 정식으로 내년 대선 출마 선언을 하지도 않았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미 '프랑스 극우의 상징' 마리 르펜 국민연합(RN) 대표를 제치고 대선주자급으로 떠오른 것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4일(현지 시각) 내년 4월 프랑스 대선을 앞두고 방송인 에리크 제무르(63)가 이민자와 무슬림, 좌파를 겨냥한 원색적인 비난을 이어가며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제무르가 프랑스에서 정치적 담론을 지배하고 있다"고 전했다.
제무르는 이달 13일 여론조사기관 해리스 인터랙티브가 집계한 여론조사에서 17%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마크롱 대통령(24%)에 이어 2위에 올랐다. 17%는 지난달 같은 기관이 그를 처음으로 조사 대상에 포함시켰을 때보다 10%포인트나 오른 수치다. 그간 여러 여론조사에서 2위를 차지했던 극우의 기수 르펜(15%)은 그에게 밀려 3위에 머물렀다.
이후 실시된 다른 조사에서도 제무르는 근소하긴 해도 꾸준히 2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아직 대권 도전을 언급하지도 않은 만큼 그가 출마를 공식화해 컨벤션 효과(대선 후보로 선출된 뒤 일정 기간 지지율이 상승하는 효과)를 볼 경우, 지지율이 한층 더 가파르게 오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일간 르피가로 논설위원 출신인 제무르는 엄격한 이민 제한과 국방예산 증대 등을 주장하며 프랑스 국민의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하고 있다. 2014년 출간한 저서 '프랑스의 자살'에서 그는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회변혁 운동이 "이민자·동성애 문제를 불러오며 국가를 망쳤다"고 주장하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200만 외국인을 추방해야 한다" "마약 밀매자들은 다 흑인과 아랍인" 등 인종차별적 발언을 일삼아 기소된 전력도 있다. 최근에는 '프랑스의 폭스뉴스'로 불리는 우파 성향의 C뉴스에서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알제리 출신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제무르는 영국처럼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미국에 대해서도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1944년 2차 세계대전 때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두고 "미군 점령과 식민화의 시작"이었다고 말한 일이 대표적이다. 그는 "르펜은 악마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며 기존의 극우 색채를 누그러뜨리는 전략을 펴고 있는 르펜을 공격해 적잖은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소속 정당도 없는 단기필마인 제무르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낮다. 프랑스에는 극우에 대한 반감이 큰 유권자가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해리스 인터랙티브의 가상 2차 투표에서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제무르가 맞붙을 경우 '43% 대(對) 57%'로 패배할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프랑스 대선은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으면 상위 1·2위 후보에 대해서만 2주 후 결선 투표를 치르는 순으로 진행된다.
전문가들은 대신 제무르의 인기가 프랑스 정계의 우경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해리스 인터랙티브 조사에서는 제무르와 르펜에 더해 그자비에 베르트랑 후보(14%)까지, 여론조사 2~4위에 극우 또는 강경 우파가 차례로 포진해 있는 모습이 연출됐다. 반면 좌파의 대표 후보인 사회당의 안 이달고 파리 시장과 야닉 자도 녹색당 대선 후보는 지지율이 각 6%씩에 그쳤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들이 손을 잡으면 극우 정권 출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도 우파 성향인 마크롱 대통령도 위기 의식을 느낀 듯 전보다 더 '우향우'하는 모습이다. 재선을 노리는 마크롱 대통령은 일부 모스크(이슬람 사원) 폐쇄 절차를 비롯해 극단적 이슬람 선전 단체 해산을 진행 중이며, 최근에는 알제리 등 전통 우호국인 북아프리카 3국 국민에 대한 비자 발급도 대폭 줄이겠다고 밝혔다.
제무르는 올해 출간한 저서 '프랑스는 마지막 단어를 말하지 않았다'의 표지를 디자인할 때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2015년 저서 '불구가 된 미국' 표지를 참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표지뿐만이 아니다. 정치 경력이 전혀 없고, 노동 계급의 주요 관심사가 무역과 이주민 문제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당 밖의 사람이라는 점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나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 유럽판은 제무르가 그의 지지자들에게 "정치적 올바름에 포위된 사회에서 마음껏 숨쉴 수 있게 해주는 시원한 공기와 같은 존재"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