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일 넘게 치러진 이란전에서 인공지능(AI)과 무인화 무기가 신뢰도와 효율성을 입증하면서, 전 세계 벤처캐피털(VC) 자금이 국방 기술 시장으로 쏟아지고 있다. VC는 성장 가능성이 큰 스타트업에 초기 자본을 대고 회사 가치가 오르면 차익을 챙기는 투자자다.

22일(현지시각)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피치북에 따르면 올 들어 전 세계 국방 기술 스타트업이 VC로부터 끌어모은 돈은 123억 달러(약 18조8000억원)에 이른다.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거의 두 배다. 작년 한 해 전체 투자액인 99억5000만 달러를 반년도 안돼 넘어섰다.

19일 파리 북부 르 부르제 공항에서 열린 국제 파리 에어쇼에서 방문객들이 안두릴 부스를 관찰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동안 방위산업계에서 주인공은 록히드마틴이나 보잉처럼 전투기와 미사일을 만드는 대형 하드웨어 기업 몫이었다. 투자도 이들에게 몰렸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분쟁이 길어지면서, 값싸고 빠르게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는 무기 수요가 폭발했다. 무인기(드론), 자율주행 선박, 전장용 AI 같은 무기들이다. 이들은 적은 비용으로 상대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이른바 '비대칭 무기'에 속한다. 우크라이나와 중동 전장에서 실리콘밸리식 소프트웨어와 자율무기가 성능을 입증하자, 돈이 소프트웨어 쪽으로 빠르게 옮겨갔다.

미국은 국방 기술 투자 부문에서도 압도적인 지배력을 보이고 있다. 피치북 데이터에 따르면 미국 스타트업들은 올해 상반기 전체 국방 기술 투자액 123억 달러 가운데 93%에 해당하는 114억 달러를 가져갔다. 이 가운데 절반 가까이를 안두릴 인더스트리가 차지했다. 드론과 감시탑 시스템 설계로 유명한 안두릴 인터스트리는 가상현실 기기 오큘러스를 만든 팔머 럭키가 2017년 세운 회사다. 이 회사는 지난달에만 50억 달러를 추가 유치하면서 기업가치를 610억 달러로 일년 새 두 배 가까이 끌어올렸다. 투자자 명단에는 오픈AI 투자를 주도한 스라이브 캐피털과 세계 최대 규모 VC 앤드리슨 호로위츠가 이름을 올렸다.

안두릴은 완제품 무기가 아니라 무기를 움직이는 소프트웨어 설계에 강점을 지닌 기업이다. '래티스'라는 AI 플랫폼을 기반으로 무인 드론과 자율주행 잠수함, 요격 시스템을 미군과 동맹국에 공급한다. 미 육군은 지난 3월 안두릴과 드론 위협에 맞서는 무기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명목으로 최대 200억 달러 규모 10년 단위 통합 계약을 맺었다. 조달 절차 120건을 하나로 묶은 초대형 계약으로 평가된다. 지난달에는 컨테이너에서 쏘는 저가형 순항미사일 '바라쿠다-500M'을 3년간 최소 3000발 공급하는 협정도 체결했다. 안두릴은 "이 미사일은 약 10가지 공구로 30시간이면 한 발을 조립할 수 있고, 부품 70%를 시중에서 구할 수 있다"며 "비싸고 만들기 어려운 기존 미사일과 완전히 다른 무기"라고 했다.

미국에서는 안두릴 외에도 자율 수상함 전문 기업 사로닉 테크놀로지스, 항공 드론 제조사 실드 AI가 대규모 자금 조달에 성공했다. 사로닉은 자율주행으로 정찰과 작전을 수행하는 무인 수상함 '머로더'를 공개했다. 이 기업은 올해 말까지 무인 수상함을 운용할 수 있는 차세대 조선소 '포트 알파'를 완공할 예정이다. 사로닉은 사람이 타지 않아도 오래 바다에서 작전할 수 있는 군사 기술을 확보해 해상 군사력을 비대칭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드러냈다.

2일 러시아 특수 군사 작전 지역에서 육군 소속 군인이 몰니야 모델 전투 드론을 사용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러시아와 수년째 맞서고 있는 유럽도 방위 기술 기업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 유럽 국방 스타트업이 올해 확보한 투자금액은 4억6000만 달러(약 7100억원) 규모다. 현재 협상 중인 대형 건까지 포함하면 연말 최종 규모는 이를 크게 웃돌 전망이라고 FT는 전했다.

유럽 방산 스타트업계 대표 주자는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 창업자 다니엘 에크가 후원하는 독일의 헬싱이다. 이 기업은 현재 180억 달러(약 27조 7000억원) 기업가치를 인정받고, 12억 달러를 이미 조달했다. 헬싱은 센서가 모은 데이터와 AI를 결합해 전장 상황을 실시간 분석하고 자율 타격을 돕는 소프트웨어를 만든다. 현재 사거리 100㎞짜리 자폭 드론 'HX-2'를 우크라이나에 추가로 6000대 공급하기로 했고, 독일 남부에 월 1000대 이상을 찍어내는 첫 생산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독일 의회는 지난 2월 HX-2 도입에 2억6900만 유로(약 4700억원)를 우선 배정하면서 헬싱에 힘을 실어줬다. 이 계약은 앞으로 7년에 걸쳐 최대 14억6000만 유로까지 5배 이상 늘어날 수 있다. 자폭 드론을 만드는 또 다른 독일 스타트업 스타크는 기업가치 25억 유로(약 4조3700억원)를 평가받고 최소 3억 유로 투자 유치를 협상 중이다.

전선은 우주와 바다로도 넓어졌다. 위성으로 전장 정보를 실시간 파악하는 기술은 이란전을 거치면서 핵심 방어 자산으로 떠올랐다. 합성개구레이더(SAR) 위성 기술을 앞세운 핀란드 위성 제조사 아이싸이는 이달 10억 유로를 조달했다. SAR은 지상과 해양에 레이더파를 발사할 때 오는 미세한 시간차를 분석해 거리·지형 등을 분석하는 초정밀 레이더다. 아이싸이 기업가치는 현재 100억 유로 수준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12월 투자 유치 때보다 6개월 만에 네 배가 뛰었다. 해상에서는 영국 스타트업 크라켄 테크놀로지가 호르무즈 해협에 투입할 영국 해군 자율 기뢰 탐지정 공급사로 뽑힌 뒤, 10억 달러 기업가치를 내세워 1억 달러 투자를 추진하고 있다.

JP모건 대니얼 루드니키 슐룸베르거 유럽·중동·아시아 안보·회복력 책임자는 "우리는 전쟁 수행 방식에서 역사상 가장 중요한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며 "투자자들이 이 부문에 장기 수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기업가치가 가파르게 올랐다"고 했다. 특히 유럽은 자체 방위력 강화라는 명분 아래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도 방산 스타트업 투자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유럽 최대 국방 VC 중 하나인 익스페디션스의 미콜라이 피를레이 파트너는 "초기 투자가 유럽 무기고 재건에 집중됐다면, 이제는 최전선부터 사소한 칩 하나에 이르기까지 공급망을 확보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며 "센서, 전자전, 첨단 AI 모델 등 모든 면에서 유럽은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고 FT에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