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원화와 일본 엔화, 인도네시아 루피아화까지 아시아 주요 통화들이 일제히 약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아시아 통화 약세 현상을 분석하며 에너지 가격 급등과 미국 금리 상승, 인공지능(AI) 열풍 등 세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10일 일본 도쿄의 한 거리에서 한 남성이 도쿄증권거래소의 닛케이225 지수와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이 표시된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다. /AFP

일본 정부는 올해 들어 700억 달러 이상을 쏟아부으며 엔화 방어에 나섰고,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은 긴급 금리 인상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한국 역시 외환시장 점검을 강화하고 있지만 원화 가치는 올해 들어 달러 대비 5% 넘게 떨어졌다. 통화 약세는 수출 기업에는 호재지만 수입 물가를 끌어올려 소비자 부담을 키운다. 특히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아시아 국가들에는 더욱 민감한 문제다.

WSJ은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 에너지 가격 상승을 꼽았다. 한국과 일본은 에너지 소비량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한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이후 호르무즈 해협 봉쇄 사태가 이어지면서 국제 유가와 천연가스 가격이 상승했고, 아시아 국가들의 에너지 수입 부담도 커졌다. 원유 거래가 대부분 달러로 이뤄지는 만큼 에너지 수입 비용 증가는 곧 달러 수요 증가와 통화 약세로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에너지 가격만으로는 최근 환율 움직임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동아시아 전문 경제분석기관 이스트아시아이콘(East Asia Econ)의 폴 케이비 대표는 WSJ에 "아시아 통화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 이전부터 이미 약세를 보이고 있었다"고 말했다.

WSJ은 미국 경제를 또 다른 원인으로 꼽았다. 미국 경제가 예상보다 견조한 성장세를 이어가면서 국채 금리가 상승했고, 투자자들이 더 높은 수익률을 찾아 미국 자산으로 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과 아시아 국가 간 금리 격차가 확대되면서 달러 강세와 아시아 통화 약세가 심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WSJ이 특히 주목한 것은 AI가 환율에 미치는 영향이다. 한국과 대만, 일본은 AI 붐의 대표적인 수혜국으로 꼽힌다. 메모리 반도체와 광케이블, 첨단 소재 수출이 급증하면서 수출 호황을 누리고 있다. 통상 수출이 늘면 외화가 유입되면서 통화 가치도 상승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WSJ은 그 이유로 미국으로 향하는 자금 흐름을 지목했다. AI 투자 열풍의 중심이 미국에 있는 만큼 한국과 일본, 대만 투자자들이 엔비디아를 비롯한 미국 기술주를 적극 매수하고 있고, 외국인 투자자들 역시 아시아 증시에서 수익을 실현한 뒤 미국 시장으로 자금을 옮기고 있다는 것이다.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가 다시 미국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통화 강세 효과가 상쇄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이다. AI용 반도체 수요 급증으로 수출은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원화는 올해 들어 달러 대비 5% 이상 하락했다. WSJ은 이를 두고 '수출 호황 속 통화 약세'라는 보기 드문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HSBC의 아시아 수석 이코노미스트 프레데릭 노이만은 WSJ에 "경제학자로 일하면서 이런 현상을 거의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아시아 통화 약세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중동발 에너지 불안이 여전한 데다 미국 금리 인하 기대가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무역이 환율을 움직였다면, 이제는 AI가 만들어낸 글로벌 자금 이동이 환율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