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이후 세계 에너지 물류의 핵심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됐지만, 국제 유가는 시장의 예상을 깨고 배럴당 100달러 선을 밑돌고 있다.
중동 지역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상황은 전문가들이 경고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카타르의 세계 최대 액화천연가스(LNG) 플랜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주요 정유 시설이 공격받았으며, 전 세계 석유·가스 물동량의 20%를 담당하는 호르무즈 해협에는 유조선 150여 척이 발이 묶여 있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과거 오일쇼크에 비하면 미미하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4일(현지 시각)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교전이 시작된 이후 국제 유가는 약 30% 상승했다. 브렌트유는 배럴당 85달러까지 올라 2024년 7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기록한 128달러에는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 미국의 증산과 낮아진 의존도
과거에 비해 시장 충격이 제한적인 이유는 무엇보다 세계 에너지 시장 구조 변화가 꼽힌다. 1970년대 오일쇼크 당시와 달리 현재 선진국 경제의 석유 의존도는 크게 낮아졌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1970년대 오일쇼크 당시에는 석유 공급 차질이 곧바로 세계 경제 전반의 충격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1973~1974년 아랍 산유국의 석유 금수 조치 때 유가는 약 260% 급등했고, 1979년 이란 혁명 이후에도 약 160% 상승했다.
하지만 현재는 상황이 다르다. 미국이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부상했고 가이아나·브라질·캐나다 등에서도 신규 원유 공급이 확대되면서 중동 의존도가 과거보다 낮아졌다고 FT는 분석했다. 또한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 정부가 전략비축유(SPR)를 방출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것이라는 기대도 시장 안정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 위기 학습한 석유 시장... 우회로와 재고가 버팀목
석유 시장의 대응 능력이 이전보다 크게 높아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과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거치며 글로벌 원유 물류망이 재편됐고, 트레이더들도 유조선 항로를 빠르게 조정하는 데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는 호르무즈 해협을 통하지 않고도 하루 900만 배럴을 수출할 수 있는 우회 파이프라인을 확보하고 있다. 에너지 분석업체 보텍사(Vortexa)에 따르면 중국은 신규 공급 없이도 약 124일을 버틸 수 있는 원유 재고를 보유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도 약 20억 배럴의 재고가 있어 당장의 중동발 공급 차질을 일부 상쇄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고 FT는 전했다.
다만 분쟁이 장기화할 경우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MST파이낸셜의 사울 카보닉 분석가는 호르무즈 해협이 2주 동안 봉쇄될 경우 약 2억5000만 배럴의 원유 공급이 막힐 수 있다고 추산했다. 그는 "이 경우 일부 걸프 국가들은 저장 공간 부족으로 생산을 중단해야 할 가능성이 있으며 유가가 100달러를 넘어설 수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