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행정부가 은행 등 각종 금융기관에 시민권 정보 수집을 의무화하는 전례 없는 방안을 추진한다. 표면적으로는 불법 이민자 은행 계좌 개설을 원천적으로 차단해 경제 활동 기반을 끊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워싱턴 정가에서는 이번 조치가 미국 특유의 허술한 신분 증명 체계를 강제로 보완하고, 나아가 부정선거 논란을 뿌리 뽑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포석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 주요 은행. /연합뉴스

25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주요 매체 보도를 종합하면 트럼프 행정부는 재무부 주도로 은행이 신규 계좌는 물론 기존 계좌에도 여권 등 시민권을 증명할 수 있는 공적 서류를 요구하도록 강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현행법상 미국 내에서 시민권자가 아니더라도 시중 은행 계좌 개설은 어렵지 않다. 현재 미국 은행들은 자금세탁방지법(BSA)과 고객신원확인(KYC) 규정에 따라 계좌 개설 시 이름과 생년월일·주소·사회보장번호(SSN) 같은 기본 정보를 확인하고 있다. 미국 시민권자라면 주(州) 운전면허증과 SSN만으로 계좌 개설이 가능하다. 따로 시민권 여부를 증명하는 서류를 요구하진 않는다. 은행이 수집한 시민권 정보를 연방 정부와 공유하는 시스템도 없다.

합법 체류 외국인도 절차가 유사하다. 유학생·취업비자 소지자는 여권과 비자, I-20 또는 I-94 같은 출입국 기록, 주소 증빙을 제출해 어렵지 않게 계좌를 열 수 있다. 심지어 불법 체류자도 일부 은행이나 지역 커뮤니티뱅크, 신용조합에서는 개인 납세자 식별번호(ITIN)과 자국 여권, 공과금 고지서 같은 주소 증빙으로 계좌를 열 수 있었다. 불법 체류자들까지 일단 제도권 금융으로 편입시켜야 자금 흐름을 추적하기 유리하다는 게 그동안 일관된 미국 정부 판단이었다.

미국 뉴욕 나스닥 현장에서 기업공개(IPO) 중인 브라질 디지털 은행 픽페이. /연합뉴스

미국은 한국이나 유럽 주요국처럼 중앙 정부가 일괄적으로 관리하는 일원화된 전국구 국가 신분증 제도가 없다. 1930년대 도입된 사회보장번호가 세금 납부와 금융 거래 등에서 사실상 국가 신분증 역할을 대행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한계가 뚜렷하다. 사진이나 지문 같은 생체 정보가 이 번호 발급 과정에 전혀 포함되지 않아 명의 도용 범죄에 극히 취약하다. 무엇보다 해당 번호 소지자가 정식 미국 시민권자인지 아니면 취업 비자 등을 지닌 단순 합법적 체류자인지를 사회보장번호만으로 명확히 증명할 수 없다.

일상생활이나 관공서 업무에서는 각 주 정부가 자체 발급하는 운전면허증이 가장 보편적인 신분증명서로 쓰인다. 운전면허증 발급 기준과 보안 등급은 미국 내 50개 주마다 천차만별이다. 캘리포니아나 뉴욕처럼 민주당 세가 강한 주에서는 불법 체류자도 인권 보호 명목으로 운전면허증을 합법적으로 발급 받을 수 있다.

이처럼 국가 차원에서 확고하고 통일된 신분 증명 수단이 부재하다 보니, 투표처럼 엄격한 자격 증명이 필수적인 영역에서는 끊임없이 잡음과 누수가 발생한다. 특히 구조적으로 허술한 신분 확인 시스템은 선거철마다 미 정국을 뒤흔드는 부정선거 논란의 뇌관으로 작용했다. 텍사스, 플로리다 같은 공화당 우위 주들은 투표 과정에서 사진이 부착된 엄격한 정부 발급 신분증을 사전에 요구한다. 반면 펜실베이니아 같은 핵심 격전지나 민주당 우위 주들은 서명 대조나 주소와 이름이 적힌 공과금 영수증만으로 투표가 가능하다. 아예 신분증 확인 절차 자체가 없는 선거구도 수두룩하다.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 지지층은 지속해서 이 제도적 빈틈을 타고 시민권자가 아닌 불법 이민자들이 대거 선거에 부정하게 참여해 선거 결과를 왜곡하고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금융권 인프라를 동원해 사실상 미국 내 모든 거주자의 시민권 보유 여부를 철저히 검증하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면 이 데이터가 향후 주 정부 선거인 명부 대조 작업 등에 교차 활용될 가능성도 있다.

지난 16일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제임스 탈라리코(James Talarico) 텍사스주 하원의원이 투표를 마치고 귀가하고 있다. /연합뉴

트럼프 행정부는 재무부 산하 금융범죄단속네트워크(FinCEN)를 동원해 시민권 관련 데이터를 확보하는 방안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관은 미국에서 자금 세탁 방지와 대(對)테러 자금 조달 금지법을 집행하는 기구다. 은행들은 거액 현금 거래나 의심스러운 정황이 포착되면 이 기구에 즉각 보고해야 한다. 현행 연방 은행비밀보호법은 금융범죄단속네트워크에 신원 확인을 위해 은행이 어떤 서류를 수집해야 하는지 결정할 재량권을 부여하고 있다. 주요 매체들은 재무부 내에서 금융범죄단속네트워크와 경제 제재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고위 관료 교체가 임박했다고 전했다.

정치권 반응은 진영에 따라 극명하게 엇갈렸다. 톰 코튼 공화당 상원의원은 "불법 이민자들이 우리 은행 시스템에 무단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한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력 있는 조치를 강력히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해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에게 "미국 은행 시스템 이용은 우리의 법과 주권을 온전히 존중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어야 한다"는 서한을 직접 보냈던 인물이다. 반면 백악관은 여론 역풍을 의식한 듯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다. 쿠시 데사이 백악관 대변인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은 잠재적 정책 수립 단계 사안에 대한 보도"라며 선을 그었다.

은행들은 행정부가 새 요구 사항을 강제하도록 규정을 바꾸려면 재무부 산하 금융범죄단속네트워크에서 수개월이 걸리는 공식적인 규칙 제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이들은 갑작스럽고 대대적인 규제 강화 움직임에 강하게 반발했다. 수천만 명에 달하는 기존 계좌에서 시민권 정보를 일일이 소급해 수집하는 일은 천문학적인 행정 비용과 영업 현장 대혼란을 초래할 전망이다. 더욱이 미국 전체 인구 절반 가량은 해외여행 경험이 없어 여권 같은 연방 신분증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평범한 시민조차 시민권을 증명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가 단순히 은행 규제 하나를 추가하는 차원이 아니라, 미국 사회 근간을 이루는 신분과 권리 개념을 재정의하려는 중대한 시도로 평가했다. 스페인어권 유력지 엘 파이스는 "이 조치가 실행되면 서류 미비 이민자 수백만 명이 제도권 금융에서 퇴출당할 것"이라며 "미국 금융 시스템의 역사적인 전환점"이라고 했다. 제러미 크레스 미시간대 교수는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에서 "이번 명령은 합법적 거주자들조차 은행 시스템을 이용하지 못하게 막아 수수료가 비싼 음성적 금융 서비스로 취약 계층을 내몰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은행 시스템을 철저히 무기화하는 행태"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