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재 가격 상승과 공급망 차질을 명분 삼아 가격표를 수시로 바꿔 달던 글로벌 식품 공룡들이 마침내 백기를 들기 시작했다. 세계 최대 식음료 기업 펩시코(PepsiCo)가 자사 주력 스낵 제품인 도리토스(Doritos), 치토스(Cheetos), 레이스(Lay's) 가격을 최대 15% 인하한다고 3일(현지시각) 발표했다.

식품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고물가에 지친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아버리는 현상이 임계점을 넘었다는 신호로 해석했다. 기업들이 생존을 위해 수익성을 포기하고 점유율(물량) 방어에 나서는 뉴 노멀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례라는 평가도 나왔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한 대형마트에서 소비자가 펩시코 과자 봉지를 카트에 싣고 지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펩시코의 이번 결정은 철저한 위기감의 발로다. 겉으로 드러난 2025년 4분기 성적표는 나쁘지 않았다. 매출은 293억달러(약 40조원)로 시장 예상치를 웃돌았다. 순이익 역시 2024년 같은 기간보다 67%나 급증한 25억4000만달러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면을 들여다보면 제품을 많이 팔아 매출이 오르지 않고, 가격을 올린 덕분(price effect)이었다. 얼마나 팔렸는지를 보여주는 판매 물량(volume)은 이전보다 줄었다. 지난해 펩시코 북미 식품 사업부 판매량은 1% 줄었고, 음료 부문은 4% 감소했다.

라몬 라과르타 펩시코 최고경영자(CEO)는 실적 발표 직후 열린 컨퍼런스 콜에서 이를 두고 "저소득·중산층 소비자 구매력(affordability)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글로벌 식품 대기업들은 팬데믹 이후 몇 년간 원가가 오르면 그에 맞춰 큰 폭으로 가격을 올리는 식으로 이익을 보전했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더 이상 이를 용인하지 않고 저렴한 유통사 자체 브랜드(PB) 상품으로 갈아타거나 아예 과자 소비를 줄이면서, 가격 인상으로 버티는 전략이 한계에 봉착했다.

펩시코 스낵류 가격 인하

펩시코는 오는 7일 열리는 미국 최대 스포츠 이벤트 '슈퍼볼'을 전략을 바꾸는 기점으로 삼았다.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감자칩 같은 스낵류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시기에 맞춰 가격 인하 효과를 극대화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번 가격 인하는 권장소비자가격 자체를 낮추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제품 용량이나 성분은 그대로 유지하고 가격만 낮추는 정공법을 택했다.

이는 유럽 시장에서 겪은 굴욕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로도 읽힌다. 앞서 프랑스 유통업체 까르푸는 펩시코가 제품 용량은 줄이고 가격은 올리는 '슈링크플레이션'을 과도하게 단행한다며 매대에서 펩시 제품을 퇴출하는 초강수를 뒀다. 전문가들은 "소비자 신뢰를 잃으면 시장 지배력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공포가 펩시코 경영진을 움직였다"고 전했다.

물론 이번 가격 인하가 순수한 '소비자 사랑' 차원에서만 비롯되진 않았다. 월가에서는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 입김이 작용했다고 본다. 엘리엇은 지난해 9월 펩시코 지분 40억달러를 확보한 뒤, 부진했던 북미 식품 사업 부문 성과 개선을 위해 비용 절감과 가격 정책 수정을 강력히 요구했다.

여기에 'GLP-1(비만치료제)'의 확산이라는 구조적 공포도 겹쳤다. 위고비, 오젬픽 같은 식욕 억제제가 대중화되면서 미국에서는 스낵 섭취량 자체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실제 펩시코는 소포장 제품 라인업을 강화하는 등 변화된 소비 패턴에 대응하고 있다. 동시에 근본적으로 '비싸니 먹지 않는다'는 요인도 제거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커졌다. 펩시코는 스낵류 가격을 내리는 대신 공장 3곳을 폐쇄하고 인력을 감축하는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병행하기로 했다.

영국 레스터 펩시코 워커스 공장에서 치토스를 생산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부 전문가들은 펩시코가 경쟁사보다 먼저 가격을 내려 시장 주도권을 쥐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 효과를 누릴 것으로 내다봤다. 블룸버그는 전문가를 인용해 "식품 시장은 물량이 주도한다"며 "펩시코가 경쟁사보다 먼저 움직여 업계 분위기를 원하는 대로 설정하고, 이 방식으로 소매점 점유율을 회복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면 이미 돌아선 소비자 마음과 추세를 되돌리기엔 가격 정책 변화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비관론도 나왔다. TD 코웬 롭 모스코우 애널리스트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소비자들은 지난 4년간 누적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지쳐 있다"며 "이번 인하가 일부 도움은 되겠지만, 여전히 가격이 비싸다고 느끼는 소비자들에게는 의미없는 위로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경쟁사 제너럴 밀스는 지난해 일부 제품 가격을 소폭 조정했지만, 판매량 감소세를 완전히 막지 못했다.

펩시코 스낵 가격 인하, 한국 전이 가능성

미국발 가격 파괴 바람이 한국 시장까지 불어올 가능성은 희박하다. 미국에서 유통하는 도리토스와 치토스는 한국 제품과 유통 구조가 완전히 다르다. 이번 조치는 펩시코 미국 본사가 관할하는 북미 시장 내 권장소비자가격 인하에 국한된다. 한국에서 팔리는 도리토스와 치토스는 롯데웰푸드가 펩시코와 라이센스 계약을 맺고 국내 공장에서 직접 생산·판매하는 제품이다. 원재료 수급부터 생산 비용, 마진 구조가 미국과 별개로 움직인다. 라이센스 수수료 인하 같은 본사 차원 조치가 없는 한 국내 가격이 내려갈 유인은 없다.

다만 레이스 감자칩은 완제품을 수입해 판매하는 구조다. 수입사가 들여오는 공급가가 낮아지면 국내 대형마트나 편의점에서 판매 가격을 조정할 여지가 생긴다. 다만 작년보다 미국 달러화 환율이 오르고, 물류비 등 국내 유통사 마진 정책을 고려하면 소비자가 체감할 만한 즉각적인 인하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일각에서는 지난해 말 만료된 펩시코와 롯데웰푸드 라이센스 재계약이 새 협상 과정에 따라 가격 정책 변화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