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주권 확보를 위한 각국의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지난주 미국 정부가 자국 기업인 인텔에 총 195억 달러(약 26조원)에 달하는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한 것이 경쟁의 신호탄이었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21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 맥에너리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행사에서 발표하고 있다. /인텔 제공

20일(현지 시각) 백악관은 성명을 통해 미 상무부가 반도체지원법(CHIPS·칩스)에 따라 인텔에 직접 보조금 85억 달러, 대출 최대 110억 달러를 제공하기로 잠정 합의했다고 밝혔다. 당초 예상됐던 지원액의 2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백악관 발표 다음 날 인텔은 향후 5년간 오하이오·오리건·애리조나·뉴멕시코 등 4개 주에 총 1000억 달러를 투입해 새 반도체 공장을 짓거나 기존 공장을 확장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이제 시장의 관심은 대만 TSMC와 한국 삼성전자(005930)로 향하고 있다. 인텔 다음으로 미국 내 가장 많은 투자를 하는 반도체 제조기업인 대만 TSMC와 삼성전자는 보조금으로 각각 50억 달러, 60억 달러 선을 받을 것으로 업계는 예상한다.

◇ 미국은 왜 거금을 들여 자국 산업을 보호하나

지난 2022년 미국 하원은 중국과의 경쟁과 국가 안보에 대한 우려를 언급하며 280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및 과학법을 통과시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원격 근무 등 비대면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IT 제품 수요가 크게 늘었는데, 이때 급증한 반도체 수요를 공급량이 따라가지 못했었다. 당시 공급망이 붕괴되면서 많은 국가에서 자국의 칩 제조 역량을 발전시켰는데, 미국은 자국의 반도체 제조 능력은 오히려 떨어졌다고 봤다.

이에 미국은 향후 5년 동안 미국 내 반도체 생산 시설 확대에 520억 달러의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것이 지금의 칩스법이고, 미국은 칩스법을 통해 현재는 ‘제로(0)’ 수준인 미국 내 첨단 반도체 생산을 오는 2030년까지 20%로 끌어올리고 대규모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계획이다.

아시아에 치우친 반도체 생산 의존도를 낮추기 위함도 있다. 미국의 엔비디아는 최첨단 칩의 92%를 대만 TSMC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현재 세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TSMS가 57.9%로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고, 삼성전자가 12.4%로 2위다. 그 뒤를 미국의 글로벌파운드리스(6.2%), 대만의 UMC(6%), 중국의 SMIC(5.4%)가 이어가는 등 아시아가 대부분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인텔 보조금 지원안을 발표하면서 “반도체 산업을 변화시키고 완전히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겠다”면서 “첨단 반도체 제조 시설이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만들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 인텔의 삼성전자 역전, 예상보다 빠를 수도

인텔은 지난 2021년 파운드리 사업에 재진출했다. 지난 2018년 파운드리 시장을 떠난 지 3년 만의 복귀였다. 당시에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게 되자, 점유율과 수요가 얼마 되지 않는 파운드리 사업을 접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인텔은 180도 달라졌다. 인텔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시장에서 2030년까지 세계 2위를 달성하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밝혔다. 또한 인텔은 올해 안에 2나노미터(㎚·1㎚=10억분의 1m)와 1.8나노 파운드리 공정을 도입하고, 2027년 ‘꿈의 공정’으로 불리는 1.4나노 초미세 공정에서 칩을 생산하겠다고 했다.

삼성전자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 반도체 공장 공사 현장. /삼성전자 제공

현재와 같은 흐름이라면 인텔의 목표는 예상보다 빨리 달성될 가능성도 있다. 파운드리 사업은 엄청난 규모의 설비 투자가 필요한데, 인텔은 미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미국 정부의 압박 속에 생산기지를 미국에 건설하고 있는데 건설비를 포함한 비용이 많이 늘어나는 상황이다. TSMC도 미국 내 공장은 건설 비용과 인력난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텔이 삼성전자 추격을 선언한 상황에서 턱없이 부족한 보조금을 받게 된다면 힘겨운 경쟁이 될 수밖에 없다.

인텔이 향후 ‘제2의 칩스법’을 통해 보조금을 추가로 받는다면, 2위인 삼성전자 역전은 시간문제일 수도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팻 겔싱어 CEO는 지난 21일 워싱턴포스트(WP) 주최 포럼에서 “우리가 반도체 산업을 잃어버리는 데 30년이 더 걸렸는데 그것을 3~4년 만에 법 하나로 고칠 수는 없다”면서 “최소한 ‘제2의 칩스법’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오는 2030년까지 미국에서 전 세계 반도체의 약 30%를 생산하겠다”라고 했다. 이는 미국 정부의 목표보다 10%포인트(P) 높은 수치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도 두 번째 칩스법 등 지속적인 투자가 있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러몬도 장관은 “미국 반도체가 세계를 선도하고 싶은데 너무 격차가 벌어졌다”며 제2의 칩스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 각국이 보조금 뿌릴 때 한국은 ‘조용’

미국을 시작으로 각국에서는 반도체 보조금 경쟁이 한창이다. 일본은 18조원 규모의 1차 지원금에 추가 지원금까지 내걸었다. 2030년까지 국가 반도체 매출을 현재의 세 배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일본은 TSMC의 구마모토 제1공장 건설 비용의 약 40%에 해당하는 4760억엔(약 4조2232억원)을 지원했으며 올해 말 착공에 들어가는 제2공장에서 7300억엔(약 6조4768억원)을 지급한다.

유럽연합(EU)과 인도도 반도체 보조금 경쟁에 뛰어들었다. EU는 반도체 산업 발전을 위한 ‘EU 반도체법’에 합의하고 2030년까지 정부와 민간기업이 62조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인도는 13조원 규모의 반도체 보조금을 발표하고 공장 건설 비용의 50~70%를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조용하다. 한국에서는 보조금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를 포함한 대기업에 대한 특혜라는 비판 때문에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나마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K칩스법’이 나왔지만, 개정안이 아직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K칩스법은 각국의 반도체 지원 정책으로 국내 반도체 업계가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나온 법안이다. 핵심 첨단 기술에 대해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지난 2022년 12월 국회는 대기업의 반도체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은 6%에서 8%로 인상하는 K칩스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중소기업 세액공제율은 동결되면서 반쪽짜리 법안이라는 비판이 나왔고, 세액공제율을 대폭 인상하는 개정안을 추진했지만, 아직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