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미국 연방정부가 보장하는 예금 상한액은 25만 달러(약 3억2680만원)다. 은행이 파산하거나 지급 불능 상태에 빠져도 한 계좌당 25만 달러 이하가 예치된 경우 보장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등 중소은행이 파산한 이후 예금 보호 한도를 상향하라는 압박에 직면했다. 은행업계는 물론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에서 예금 보호 한도를 높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백악관은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재닛 옐런 미 재무부 장관이 21일(이하 현지 시각) “은행 위기가 더 악화할 경우 예금에 대한 추가 보증을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면서 미국 정부가 예금 보호 한도를 상향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고, 이에 따른 경고음도 울리고 있다.

로이터는 이날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정부 관리들이 은행의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접근 방식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의회의 승인 없이 예금보장 한도를 늘리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고 전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재무부와 연방준비은행(Fed·연준),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지난 10일 SVB가 파산하자 예금을 보호하기 위해 외환안정기금을 사용하는 방안까지 검토했으나, 다수의 지지는 얻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로이터는 “예금보장 한도를 늘리기 위해선 의회의 승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견과 의회 승인 없이 일시적으로 예금보장 한도를 늘리자는 주장이 충돌했다”며 “일부에선 예금 보호 한도 상향 없이 중소은행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고 전했다.

재닛 옐런 미 재무부 장관이 21일(현지 시각)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은행연합회 콘퍼런스에서 연설 중이다. 옐런 장관은 "당국이 유동성 문제를 막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했다고 믿지만, 필요하다면 더 많은 조치를 할 것”이라며 “중소은행이 대량 예금인출 사태를 겪는다면 비슷한 조치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 AFP=연합뉴스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미국 일부 의원은 일시적일지라도 예금 보호 한도를 상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뱅크런(예금 대량 인출)을 막아야 은행이 추가로 파산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예금자의 심리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예금 보호 한도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양당 상원의원들이 예금 보호 한도 이상의 예금도 보호하는 것이 타당한지 여부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고 전했다.

민주당 측은 긍정적인 입장이다. 로 칸나 민주당 하원의원은 중소은행의 월급 통장 예금 한도를 일시적으로 늘리는 법안을 빠르면 이번 주에 발의할 예정이다.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상원의원 등은 예금 상한선을 완전히 없앨 것을 주장하고 있다.

미국 은행 예금 보호 한도를 상향하기 위해선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하원 다수당인 공화당 일각에서는 계좌당 25만 달러를 초과하는 예금을 보장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NYT는 “아직 입장을 정하지 못한 의원이 많고, 공개적으로 예금 보호 상한제 해제를 반대하는 의원도 있어 일시적으로라도 상한선을 조정하는 법안이 통과될지는 미지수”라며 “예금 보호 한도 상향은 예금을 맡긴 이들을 진정시킬 수는 있지만, 은행의 모럴해저드 등 단점이 있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 중견은행연합은 FDIC에 모든 예금을 향후 2년 동안 보장할 것을 촉구했다. 중견은행연합은 지난주 FDIC에 “모든 예금을 보장해야 중소은행에서 예금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모든 은행이 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예금 보호 한도를 상향할 경우 은행에 더 많은 규제가 가해지거나, 더 높은 수수료가 부과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백악관은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대신 SVB와 시그니처은행 파산 직후 FDIC가 지급 보장 한도를 초과하는 예금을 전액 지급하겠다고 보장했고, 이후 시장이 안정을 찾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마이클 기쿠카와 백악관 대변인은 지난 20일 “행정부와 규제 당국이 지난 주말 단호한 조치를 취한 이후 전국의 지역은행 예금이 안정됐다”고 강조했다. 재무부 대변인은 로이터에 “최근 취한 단호한 조치로 인해 상황이 안정됐고 예금 흐름이 개선됐다”며 “미국인은 예금이 안전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옐런 재무장관이 미국은행연합회(ABA) 콘퍼런스에서 “당국이 유동성 문제를 막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했다고 믿지만, 필요하다면 더 많은 조치를 할 것”이라며 “중소은행이 대량 예금인출 사태를 겪는다면 비슷한 조치를 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예금한도 상향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 정부가 예금한도 상향에 무게를 싣고 있는 것으로 보이자 위험한 선례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아론 클레인 브루킹스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은 NYT에 “위기 상황은 계속해서 일어나는데 (예금한도를 상향해 문제를 덮으면) 시장이 이를 일시적이라고 믿을 수 있다”며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