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열흘가량 앞두고 늦은 밤 도착한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숙소 로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보석처럼 영롱한 반짝이 전구와 푸른색 계열의 공모양 장식으로 온몸을 휘감은 흰색 트리였다. 무슬림 국가에 성탄 축하 트리라니!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진 아부다비 갤러리아 백화점 내부. /이용성 기자

이튿날 찾은 한 대형 쇼핑몰 중앙 통로에 놓인 높이 1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대형 트리 주변엔 캐럴이 흘러나왔다. 잠시 귀를 의심하며 걸음을 멈췄다. “글로리아 인 엑스첼시스 데오(gloria in excelsis deo, 하늘 높은 곳에는 신에게 영광)”라는 라틴어 가사가 등장하는, 교회와 성당에서 많이 부르는 ‘찬양곡’이었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호호호 메리크리스마스!’를 외치며 날아갈 듯 천장에 매달린 대형 산타 썰매 장식이 인상적인 갤러리아 백화점에는 없는 게 없었다. 미드(미국 드라마) ‘섹스 앤더 시티’에서 주인공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소개되며 유명해진 컵케이크 전문점 매그놀리아와 133년 전통의 프랑스 베이커리 카페 폴(Paul) 매장까지.

세계 어디에 내놔도 화려함에서 밀리지 않을 쇼핑 공간에 이슬람 전통두건인 흰색 ‘구트라’ 쓴 남성들과 검은 ‘차도르’를 착용한 여성들이 오가는 모습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중동경제 전문가인 이권형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세계지역연구센터 소장은 조선비즈에 “중동은 완전경쟁시장에 가깝다”며 “토착산업이 없다 보니 거의 모든 걸 동일한 관세로 다 받아들인다”고 했다.

중동 전문가들은 중동 국가들 중 아부다비와 두바이를 포함하는 UAE가 가장 개방적이며, 사우디아라비아가 보수적인 대척점에 있다고 입을 모았다. 사우디에도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을까? 서울에 돌아와 열흘이나 지난 후 접한 외신 기사를 읽고 나서야 궁금증이 풀렸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사우디에선 기존에 성탄절을 공식적으로 기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올해부터는 성탄 기념 전시를 즐기고 트리를 꾸미는 등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게 됐다.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 사는 레바논인 알리아 오바이디는 가디언에 “지난 몇 년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려면 시장에 가서 인도 상인과 몰래 접촉해 박스 안에 숨겨 집으로 가져와야 했지만, 이제 사우디에서도 크리스마스를 안전하게 즐길 수 있게 됐다. 정말 큰 변화”라고 말했다.

UAE 찾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중동은 기회의 땅”

사우디와 UAE를 비롯한 중동의 걸프 국가들은 지난 1년간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화제를 만들어냈다.

카타르는 사상 최초로 겨울에 열린 월드컵의 개최국으로 주목받았다. 카타르는 2010년 개최지 확정 후 지난 12년간 월드컵을 준비하기 위해 2200억 달러(약 277조원)라는 천문학적 비용을 쏟아 부었다. 7개 경기장을 비롯해 지하철과 호텔 등을 새로 건설하는 등 국가 개조 수준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카타르 정부는 월드컵 경제효과를 우리 돈 약 26조원으로 예상하고 있다. 투자 금액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월드컵 개최로 인한 국가 홍보는 경제적 금액만으로 환산하기 어렵다.

UAE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취임 후 첫 해외 출장지로 낙점 받았다. UAE에는 삼성물산을 포함한 ‘팀 코리아’ 컨소시엄이 맡아 2012년에 착공, 13년째 공사를 진행 중인 바라카 원전이 있다. 현지를 찾은 이 회장은 “중동은 기회의 땅”이라고 말하며 기대를 표했다.

‘제2의 중동 붐’에 대한 기대감은 ‘사우디의 실세’ 무함마드 빈 살만(37) 왕세자가 지난 11월 17일 한국에 다녀간 뒤 한껏 고조됐다. 그 중심에는 빈 살만 왕세자가 주도하는 네옴시티 프로젝트가 있었다.

네옴시티 프로젝트는 석유 중심의 사우디 경제를 대전환하기 위해 빈살만 왕세자가 강력한 의지를 갖고 추진한 신도시다. 네옴은 그리스어로 새롭다는 뜻의 ‘네오’에 아랍어로 미래를 의미하는 ‘무스타크발’의 첫 글자 ‘M’을 합친 단어다.

독특한 외관의 루브르 아부다비 건물 입구. /이용성 기자

사우디 북서부 타북 주에 서울시 약 44배에 달하는 약 2만6500㎢에 미래형 산업·주거·관광특구를 조성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예상 사업비는 5000억 달러(약 630조원)이지만, 이를 완성하는 데 1조 달러가 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사우디 정부는 오일머니를 우선 투입하고, 나머지는 해외에서 투자를 받을 계획이다.

친환경 에너지·AI(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이 총동원된 스마트 시티로, SF 영화에나 나올 법한 조감도 영상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조 달러의 재산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빈 살만 왕세자는 월스트리트저널(WSJ) 인터뷰에서 네옴을 언급하며 “나만의 피라미드를 짓고 싶다”고 했다.

사우디에 등장한 크리스마스 트리도 네옴시티 프로젝트와 일정 부분 관련이 있다. 현재 3600만 명의 사우디 인구 중 70%가 30세 미만이다. 따라서 탄탄한 지지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는 젊은 층에 어필하는 정책을 펼 수밖에 없다. 여성 운전을 허용하고 영화관을 개방한 것도, 크리스마스 트리를 허용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우디로서는 대외 이미지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오일머니만으로 네옴 프로젝트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개방하고 바뀌지 않으면 해외 투자금 유치에 애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 풍부한 석유 자원은 축복이자 저주

중동의 변화를 이끄는 가장 큰 원동력은 화석에너지 고갈에 대한 위기감이다. 지난 2014년 배럴당 100달러 선이던 두바이유 가격이 2016년 초 20달러 선까지 급락한 것이 컸다. 풍부한 석유 자원은 중동 국가들에 축복이자 저주였다. 유가의 오르고 내림에 따라 경제가 출렁이고 재정도 악화됐기 때문이다. 물가도 치솟았다.

여기에 미국발 ‘셰일 에너지 혁명’으로 인한 석유와 천연가스 공급 증가도 불안감을 부추겼다. 사우디를 필두로 한 중동 주요국들이 ‘탈(脫)석유’를 위한 대대적인 변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은 생존을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유가가 급락 중이던 2016년 4월 사우디는 국가 혁신 계획인 ‘비전 2030′을 발표했다. 이와 함께 당시 1630억리얄(약 56조2500억원) 규모의 비(非)석유 부문 수입은 2030년까지 1조 리얄로 늘린다는 목표도 세웠다. 네옴시티 프로젝트는 비전 2030의 핵심 퍼즐조각이다.

다른 걸프 국가들도 앞다퉈 경제개혁 프로젝트를 밀어붙이고 있다. 아부다비는 ‘아부다비 경제비전 2030′, 쿠웨이트는 ‘비전쿠웨이트 2035′, 카타르는 ‘카타르국가비전 2030′이란 이름으로 각각 탈석유 경제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UAE를 구성하는 7개 토후국 중 맏형인 아부다비가 관광객을 유치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문화예술 분야 투자를 늘린 것도 주목할 만 하다. 270억 달러를 들여 조성 중인 ‘사디야트(Saadiyat) 아일랜드 프로젝트’가 핵심 사업이다.

사디야트는 ‘행복’이라는 뜻의 아랍어다. 자연섬인 사디야트에는 2017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분원이 들어섰다. 콧대 높은 프랑스가 파리 외에 다른 곳에 루브르 박물관 분원 운영을 허락한 건 아부다비가 유일하다. 각계의 높은 기대 속에서도 오랫동안 지연됐던 구겐하임 아부다비 미술관도 2025년 개관 예정이다.

석유 의존도가 높은 중동 국가의 경제성장은 유가 변동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해도 탈석유 경제 확립에 대한 절박함 만큼은 부인하기 어렵다. 아부다비에서 만난 남찬우 UAE 한국문화원장은 인터넷상에서 “낙타를 타고 다니던 조상들이 석유 때문에 부자가 됐는데 석유가 떨어지면 다시 낙타를 타고 다니게 될 수도 있다” 글을 종종 볼 수 있다고 귀띔했다.

상향 조정되는 중동 건설시장 규모 전망. /조선DB

절박함이 큰 만큼 ‘유가가 괜찮을 때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여기에 국제경제 상황 변화도 투자처로서 중동의 매력도를 높였다.

코로나19 팬데믹(전염병의 세계적인 대유행) 관련 규제가 풀리고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시장의 돈이 말라가는 상황에서 고유가로 현금이 풍부한 중동이 주목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구세주 노릇을 했던 중국은 강력한 코로나19 규제 ‘제로코로나’ 장기 시행 여파로 어려움을 겪고 있고,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가 에너지를 무기화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유럽의 에너지 위기는 중동 에너지 강국에는 기회가 됐다.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주요 국가들이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카타르와 UAE 천연가스 구입을 늘렸기 때문이다.

◇ 왕정국가의 사업 성패를 좌우하는 ‘정상외교’

중동발 훈풍이 내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국내 기업들의 발걸음도 바빠졌다. 지난해 삼성엔지니어링·현대건설·현대엔지니어링이 사우디 ‘자푸라 가스처리시설’ 공사를 수주했다. 한국전력·삼성물산 건설부문도 아랍에미리트(UAE) 해상 석유생산시설, 아부다비의 육상전력망을 연결하는 초고압직류송전망(HVDC) 구축 프로젝트를 수주한 상태다.

신중론도 제기된다. 공사대금 미지급 등 리스크 요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2009년 이후 국내 건설사들끼리 과당경쟁을 벌이면서 삼성엔지니어링과 GS건설 등은 조 단위의 손실을 내기도 했다. 정부가 앞장서 ‘원팀 코리아’를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12월 6일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알 다프라(Al Dhafra)주에 위치한 바라카(Barakah) 원자력 발전소 건설 현장을 방문해 직원들과 사진촬영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전문가들은 사우디와 UAE를 비롯한 중동 왕정국가에서 비즈니스 성패를 좌우하는 요인으로 정상외교(頂上外交)를 꼽는다.

KIEP 이권형 소장은 “중동 의사결정은 항상 톱다운이다. 밑에서 올라가는 경우 없다. 기업들도 위에서 이야기 되어 아래로 내려와야 하고, 국가 간 관계도 마찬가지”라면서 “중동 기업은 국영 일색이라 우리 민간 기업들이 상대하기엔 힘이 부치는 경우가 있다. 국가 간 회담이 계속 이어지면서 국내와 현지 매체에 다뤄지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중동의 지도층 자녀들은 미국이나 유럽에 유학을 하는 경우가 많아 어릴 때부터 같이 공부하며 형성된 네트워크가 이후에도 외교나 비즈니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현지 전문가와 네트워크 부족으로 대부분의 경우 아무런 친분 없이 만나자마자 사업이나 공무 관련 이야기부터 꺼내야 하는 한국과는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다. 외교 공무원이나 기업의 지역 담당자가 자주 바뀌는 것도 네트워크 구축과 전문지식 축적에는 장애요인이다.

제도적 걸림돌도 있다. 사우디의 경우 ‘스폰서 제도’가 있어 현지 합작 브로커를 끼고 진출해야 한다. 직원의 일정 부분을 현지인으로 채워야 하는데, 이를 지키지 않으면 비자 발급 등에서 불이익을 받게 된다. 하지만 영국이나 미국 등 서구 선진국도 그런 부분을 감수하면서 현지 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기 때문에 불평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