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정계를 떠난 원로(元老)들까지 총동원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대화 채널을 다시 열려는 시도에 나섰다.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를 지낸 마리오 드라기 전 이탈리아 총리와 16년간 독일을 이끈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가 러시아 특사 유력 후보군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 평화 협상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유럽이 완전히 배제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미국 주도 협상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EU도 독자적인 대러 외교 카드를 가져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시도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2002년 6월 10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제4차 발트해 연안 국가 회의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게르하르트 슈뢰더 당시 독일 총리(왼쪽)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20일(현지시각)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EU 회원국 외교장관들은 다음 주 키프로스에서 푸틴 대통령에게 보낼 공동 특사 후보군 적합성을 처음으로 조율할 계획이다. 바로 다음달 EU 정상회의에서는 이를 공식 안건으로 다루기로 했다.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이달 초 "푸틴 대통령과 잠재적 대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EU는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크렘린궁과 공식적인 소통 창구를 모두 닫았다. 일부 회원국 정상들이 산발적으로 핫라인 통화를 시도한 사례를 빼면 EU 차원 대화 통로는 4년 넘게 끊겼다. 반면 미국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푸틴 대통령과 직통(直通) 채널을 유지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직접 푸틴 대통령과 통화하며 우크라이나 휴전안을 조율했다고 수차례 밝혔다. 그 사이 유럽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미국과 러시아가 협상을 재개해도 유럽 머리 위에서 자국 안보에 불리한 합의를 만들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현재 미국은 중동 이스라엘·이란 전쟁에 외교력을 쏟느라 우크라이나 협상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푸틴 대통령도 우크라이나 영토 할양을 전제 조건으로 고수하며 평화 협상을 사실상 멈춰 세웠다. 트럼프 행정부는 EU 측에 "미국 협상과 병행해 유럽이 푸틴과 별도로 대화해도 반대하지 않는다"는 뜻을 전달했다.

EU가 선정한 공동 특사는 EU 27개 회원국이 합의한 우크라이나전 종전 조건과 대(對)러시아 요구사항을 들고 푸틴 대통령과 직접 협상하는 임무를 맡는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유력한 카드는 드라기 전 총리다. 드라기는 2011년부터 2019년까지 ECB 총재를 지내며 유로존 재정위기를 진화한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 출신이다. 특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지 직전이었던 2021년부터 2022년까지 이탈리아 총리로 일하며 푸틴 대통령과 대면했다. 2022년 6월에는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직접 찾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회담하고, 우크라이나에 EU 가입 후보국 지위를 부여하자고 강하게 밀어붙인 전력도 있다. 이탈리아 현지 매체들은 '드라기 총리가 2022년 5월 26일 푸틴 대통령과 통화에서 가스 공급을 무기 삼는 러시아 측 압박에 굴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측도 드라기를 EU 특사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FT는 우크라이나 정부 고위 관계자를 인용해 젤렌스키 대통령이 "드라기 같은 인물이나, 현직에서 국가를 이끄는 강력한 지도자가 유럽을 대표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번 주중 프랑스·독일·영국 정상과 같은 사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드라기 뒤를 쫓는 다음 후보는 메르켈 전 총리다. 메르켈 총리는 2005년부터 2021년까지 16년간 독일 총리를 지내며 유럽에서 푸틴 대통령과 가장 오래 협상한 전력을 보유한 정치인이다. 메르켈은 옛 동독 지역 출신이라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하지만 약점도 뚜렷하다. 메르켈은 재임 기간 푸틴 대통령과 너무 가까이 지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재임 기간 메르켈 전 총리는 발트해를 통과하는 러시아산 천연가스 직송 파이프라인 노르트스트림 사업을 밀어붙였고, 2021년 기준 독일 가스 소비량 55%와 석유 소비량 34%가 러시아산으로 채워졌다. 2022년 침공 직후 러시아가 이 의존도를 무기 삼아 가스 공급을 끊으면서 유럽 전체가 에너지 위기로 빠졌다.

푸틴 대통령 역시 메르켈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자주 보였다. 2007년 1월 흑해 휴양도시 소치 회담장에 메르켈 전 총리가 개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검은 래브라도 코니를 데리고 나온 일화가 대표적이다. 메르켈 전 총리는 회고록 '자유(Freedom)'에서 "푸틴 대통령 표정에서 그가 이 상황을 즐긴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고 밝혔다. 이런 전력 때문에 독일 내에서조차 메르켈을 특사 카드로 꺼내는 데 거부감이 크다. 한 독일 기독민주당(CDU) 의원은 FT에 메르켈 전 총리를 협상가로 내세우는 구상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다. 메르켈 전 총리 본인도 18일 한 콘퍼런스에서 특사 가능성을 묻자 "다른 사람이 더 적합할 것"이라며 선을 그었다.

2019년 12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노르망디 형식 정상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 참석한 (왼쪽부터)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연합뉴스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이 메르켈 직전 독일 총리였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를 선호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우리에 대해 험담을 하지 않은 유럽 대표라면 대화할 용의가 있다"며 "오랜 친구 슈뢰더" 이름을 직접 거론했다. 슈뢰더 전 총리는 2005년 퇴임 직후 노르트스트림 컨소시엄 이사회에 합류해 고액 연봉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도 푸틴과 친분을 유지해 독일 내부에서 비판받는 인물이다. 유럽 정부와 우크라이나 측은 그를 곧바로 거부했다.

핀란드 사울리 니니스퇴 전 대통령도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린다. 니니스퇴 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과 실무적으로 관계를 유지한 유럽 내 극소수 정치인 가운데 한 명이다. 다만 핀란드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1948년부터 지켜온 군사 중립 노선을 버리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다. 한 EU 고위 관계자는 "니니스퇴는 푸틴과 협업 관계를 맺은 몇 안 되는 유럽인 가운데 한 명"이라면서도 "러시아는 지금 핀란드에 매우 화가 나 있다"고 했다. EU 내부에서는 러시아와 역사적으로 얽힌 전력이 많은 동유럽 회원국보다 과거사적 부담이 적은 서유럽 출신이 적임이라는 의견도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한 유럽 고위 관계자는 FT에 "동유럽 국가들이 가진 앙금이 없는 네덜란드나 포르투갈 같은 나라 출신이 맡아야 한다"고 했다.

러시아 측 반응은 양면적이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이날 "실용적 접근법이 승리해 현실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치기를 희망한다"며 "푸틴 대통령은 유럽 국가들에게 전화 한 통이면 닿을 거리에 있다"고 했다. 일부 러시아 관계자는 푸틴이 27개 회원국 요구사항을 뭉뚱그린 EU 공동 특사 제안을 받아들이기 보다 주요 강대국과 개별 대화를 선호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푸틴 대통령은 EU가 특사 인선을 놓고 갑론을박하는 사이 20일 베이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회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