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암살당한 미국 존 F. 케네디(JFK) 전 대통령의 유일한 외손자 잭 슐로스버거(32)가 미국 정치 일선에 등장했다. 워싱턴포스트(WP)와 AP 등 미국 주요 언론에 따르면 슐로스버거는 12일(현지시각) 내년 뉴욕 12선거구를 무대로 민주당 연방 하원의원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민주당 예비경선은 내년 6월 23일 열린다.

슐로스버거는 한국 독자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JFK의 유일한 남자 직계 후손이라는 상징성을 등에 업고 일거수일투족 주목을 받았다. 그는 JFK와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핏줄을 이은 유일한 외손자다. JFK의 딸 캐럴라인 케네디와 유명 디자이너 에드윈 슐로스버거의 막내아들이다. 어머니 캐럴라인 케네디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주일 대사를,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주호주 대사를 지낸 민주당 핵심 인사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외손자 잭 슐로스버그가 2024년 8월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DNC) 무대에 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슐로스버거는 누나 로즈, 태티아나와 함께 뉴욕 맨해튼 어퍼이스트사이드 부촌에서 성장했다. 그의 이력을 보면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뉴욕 사립 명문 컬리지잇 스쿨(Collegiate School)을 졸업하고, 2015년 예일대에서 일본 역사 전공으로 학사를 마쳤다. 예일대 재학 중에는 응급구조대(E.M.T) 자원봉사를 했다. 이후 2022년 하버드대에서 법무박사(JD)와 경영학석사(MBA) 통합 학위를 받았다. 2023년에는 뉴욕주 변호사 시험을 통과했다. 그는 당시 "아마도 상위 1% 성적으로 합격했을 것"이라는 자랑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금수저'라는 틀에 갇히지 않았다. 상원 인턴 같은 정석적인 길을 걷다가도, 하와이 한 서핑 가게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거나, 2024년 대선 기간 잡지 보그에서 정치 특파원으로 활동을 자처했다. 그는 이 기간 직접 칼럼 7편을 기고하며 다채로운 행보를 보였다. 어머니가 주일 대사로 재직할 당시에는 일본 도쿄 전자상거래 기업 라쿠텐과 주류 회사 산토리에서 근무했다. 그밖에 JFK 대통령 도서관 '뉴 프런티어 어워드' 위원회 의장을 맡는 등 가문 유산 관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슐로스버거는 자신을 '소셜 미디어 도발가(Social Media Provocateur)'로 규정한다. 그는 인스타그램과 틱톡처럼 젊은 층이 주로 활용하는 소셜미디어에 170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다. 그는 뉴욕타임스(NYT) 인터뷰에서 "나는 모두에게 맞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공언했다. 그는 게시물에서 셔츠를 벗고 비틀스 노래를 부르거나, 스케이트보드를 타며 바이런의 시를 읊기도 했다. 이는 계산된 전략이다. 그는 "인터넷 의견을 돌파하려면, 논쟁의 중심에 서야 한다"고 전했다. 어머니 캐럴라인 케네디 역시 NYT에 "아들이 민주당 선거 전략 문제점으로 소셜 미디어 활용법을 지목했다"며 "슐로스버거는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타입"이라고 평가했다.

캐럴라인 케네디와 그의 아들 잭 슐로스버그가 202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존 F. 케네디 도서관에서 열린 용기 있는 프로필상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주요 언론들은 슐로스버거 등장에 맞춰 케네디 집안의 복잡한 분열상에 주목했다. 슐로스버거의 사촌(5촌 당숙)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RFK 주니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이다. 지금도 트럼프 행정부에서 보건복지부(HHS) 장관을 맡고 있다. 그는 JFK 동생인 로버트 F. 케네디 전 법무장관의 아들이다. 한때 민주당 대선 경선에도 나섰지만, 백신 음모론 등을 주장하다 당과 완전히 갈라섰다. 그리고 결국 트럼프와 손을 잡았다.

슐로스버거는 정계 입문 선언 이전부터 RFK 주니어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2023년 RFK 주니어가 바이든 재선 도전을 비판하자 "개인적 이득과 명성을 위해 케네디 가문이라는 카멜롯을 이용한다"고 했다. 카멜롯은 영국 아서 왕 전설에서 나오는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 본거지다. 정계 진출을 앞두고는 공세 수위를 더 높였다. 그는 최근 MSNBC 방송에 출연해 RFK 주니어를 "광견병 걸린 개(rabid dog)"라고 표현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케네디 가문에 집착해 RFK 주니어에게 목줄을 채웠다"며 "그가 거짓과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며 짖고 있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슐로스버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RFK 주니어의 떨리고 자주 끊기는 목소리(연축성 발성장애)를 흉내 내며 "우리 둘 중 하나가 자폐증에 걸릴 때까지 방에 갇혀 토론하자"고 조롱하는 영상을 올려 논란을 빚었다.

정치 관계자들은 슐로스버거의 앞길이 순탄하지만은 않다고 내다봤다. 이제 미국 정계에서 '케네디'라는 이름이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가 도전하는 뉴욕 12선거구는 30년 넘게 민주당 텃밭을 지켜온 제리 내들러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한 곳이다. 슐로스버거는 이곳에서 내들러 의원의 오랜 측근이자 보좌관 출신인 마이카 래셔 주(州) 하원의원부터 앞질러야 한다. 슐로스버거 스스로 자신을 '반란군(insurgent)'으로 규정할 만큼 현재 입지는 불투명하다. 내들러 의원은 슐로스버거 지지 가능성에 대해 CNN에 "내 후계자는 공공 서비스에 종사하고, 공적인 성취 기록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며 "슐로스버거는 그런 기록이 없다"고 말했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가운데)가 2019년 5월 19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존 F. 케네디 대통령 도서관에서 캐럴라인 케네디(가장 왼쪽), 잭 슐로스버그(뒤), 빅토리아 레지 케네디(오른쪽 두번째) 등 케네디 가문 구성원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케네디 왕조'에 대한 피로감도 변수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1947년 이후 케네디 가문 구성원이 연방 공직에 없었던 해는 단 2년에 불과하다. RFK 주니어처럼 케네디 가문 구성원들은 여러 행정부 곳곳에서 근무했다. 일부는 정치에 발을 들였다가 체면을 구겼다. 패트릭 J. 케네디는 1995년부터 2011년까지 로드아일랜드주 하원의원을 지냈지만, 알코올·약물 중독, 우울증, 교통사고 등 잦은 스캔들로 유명했다. 결국 2006년 약물 복용 상태로 국회의사당 인근에서 교통사고를 내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RFK의 조카 윌리엄 케네디 스미스는 1991년 강간 혐의로 기소된 후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정치 활동은 꿈도 못 꾸게 됐다. 최근에는 2020년 슐로스버거 사촌 조 케네디 3세가 매사추세츠 상원 민주당 경선에서 현역 의원에게 참패했다.

미국 언론들은 전문가를 인용해 슐로스버거가 민주당 세대교체 기수론에 기대야 정계에 연착륙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했다. 민주당 내에서는 지난해 대선 패배 이후 세대교체 필요성에 대한 여론이 여느 때보다 힘을 얻고 있다. 최근 뉴욕시장 선거에서 34세 진보 성향 후보 조란 맘다니가 돌풍을 일으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슐로스버거 역시 일찌감치 맘다니를 지지하며 민주당 세대교체론에 동의했다.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슐로스버거가 JFK 손자라는 향수를 넘어, 도발적인 30대 기수로서 민주당 지지층을 설득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며 "뉴요커들은 며칠 전 주지사를 지냈던 정치 왕조(쿠오모 가문)를 끝장냈다. 케네디 왕조에 대해 어떻게 느낄지 지켜볼 일"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