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오후 7시 7분 인천국제공항 화물터미널에 대한항공 KE504편 화물기가 도착했다. 프랑스 파리 샤를 드 골 국제공항에서 무려 11시간을 날아온 이 화물기에는 입체파 회화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ée)'이 실려 있었다. 대한항공(003490)의 베테랑 특수화물 조업 담당자들도 이날만큼은 바짝 긴장했다. 작품 한 점당 평가액이 수백억원에 달하는 점도 부담이었지만, 피카소의 실제 작품이란 사실에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계류장에 들어선 화물기의 문이 열리자 조업 담당자들은 조심스럽게 파란색 '크레이트'(미술작품 전용 포장 박스)에 담긴 피카소의 작품을 하나씩 내렸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화물 외부에는 'Painting'(그림) 정도로만 내용이 표시된다"며 "보안 사항인 만큼, 조업 담당자들도 자신이 옮기는 게 어떤 작품인지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된다"라고 말했다.
오는 5월 1일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파블로 피카소 탄생 140주년 기념 특별전'을 앞두고 대한항공이 프랑스 파리에서 피카소의 유화, 판화, 도자기 등 110여 점의 작품을 공수해왔다. 지난 16일부터 20일, 22일, 23일 등 총 네 차례에 걸쳐 대한항공 화물기와 여객기가 각각 2번씩 작품 운송을 맡았다. 무게도 총 25t으로 단일 전시로는 국내 최대 물량이다.
미술업계에 따르면 통상 유명 작품을 대거 국내로 가져오는 과정은 4~5회에 걸쳐서 진행된다. 비행기 1대에 모두 싣고 오다가 뜻하지 않은 사고라도 나면 거장의 작품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 막대한 보험금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이 이번에 공수해온 피카소 작품들의 평가액은 총 2조원가량이다. 전시 작품에 든 보험평가액만 9000억원에 달한다.
이번 전시회의 주인공인 '한국에서의 학살'은 마지막 운송일인 이날 한국에 도착했다. 1951년 피카소가 작품을 완성한 지 70년 만에 처음으로 작품의 배경인 한국에 온 것이다. 전쟁의 잔혹성을 예술을 통해 고발한 이 작품은 '게르니카(Guernica)', '시체구덩이 (Le Charnier)'와 더불어 피카소의 반전예술 3대 걸작으로 꼽힌다.
대한항공은 피카소 작품을 들여오기 위해 공수 작업과 항공료 등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이송 과정에서 작품의 밀봉 상태를 세심하게 검사하고 최인접 주기장에 화물기를 배치해 지상 이동도 최소화했다"고 설명했다. 전시회를 주최한 비채아트뮤지엄 관계자는 "일반 화물이었으면 화물기에 최대한 많이 실으려고 화물들 사이에 공간을 남기지 않았을 텐데, 이번엔 워낙 귀중한 작품인 만큼 대한항공 측에서 크레이트들을 여유 있게 띄워 이송했다"고 설명했다.
피카소의 작품을 담은 크레이트는 모두 프랑스 현지에서 수작업으로 제작됐다. 작품 110점에 사용된 크레이트 비용만 1억원에 달했다고 한다. 크레이트는 온도와 습기로부터 작품을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도록 특수제작되는데, 내부에도 충격 흡수재가 3중으로 겹겹이 들어가 외부 충격으로부터 작품을 온전하게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전시가 끝나면 피카소의 작품들은 원래대로 크레이트에 담겨 프랑스로 돌아간다. 대한항공이 이때도 작품 운송 과정을 도맡을 가능성이 크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지난 2011년에도 프랑스로부터 외규장각 의궤 297권을 갖고 돌아왔다"며 "다양한 특수 화물을 수송한 경험이 이번 작품 운송에도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피카소 특별전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8월 29일까지 열린다. 피카소의 20대 시절부터 예술적 작업활동이 왕성했던 80대 만년의 작품까지 망라해 피카소 미술 70년을 한 곳에서 모두 볼 수 있게 구성됐다. 비채아트뮤지엄 고위 관계자는 "코로나19로 모두가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지만, 피카소 작품을 통해 잠시라도 평범한 일상을 되찾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