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코퍼(Dr. Copper)'로 불리는 구리 가격이 사상 최고치로 치솟는 가운데 국내 양대 전선 기업(LS전선·대한전선) 실적에 강력한 호재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전선 제조 원가의 70% 정도를 차지하는 구리 가격이 급등하더라도 모두 판가에 반영할 수 있는 상황이라서다.
여기에 전력망·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수요가 급증하는데 전선 생산량은 이를 따라가지 못해 판매 가격이 더 오를 것이란 기대감도 있다. 구리는 건설, 전자, 전력망, 자동차 등 전 산업군에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실물 경기의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한다는 의미로 닥터 코퍼란 별칭이 붙는다.
14일 산업통상자원부 원자재가격정보에 따르면 런던금속거래소(LME) 기준 전기동 현물 가격은 지난 11일 1톤(t)당 1만4238.5달러를 기록해 연초 대비 13.26% 상승했다. 전기동은 전기분해를 통해 정련된 순도 99.95% 이상의 구리를 뜻한다. 이달 전기동 평균 가격은 t당 1만4477.4달러로, 지난해 9월 평균 가격(9952.7달러)과 비교하면 1년 새 45.4% 뛰었다.
전선 제조 원가에서 구리 비율이 70%에 달할 정도로 비중이 크지만, 구리 가격이 뛰어도 이익률엔 큰 영향이 없다는 게 전선 대기업들의 주장이다. 보통 전선 판매 계약을 할 때 구리 시세 변동분을 판매 가격에 자동 반영하는 '에스컬레이션(Escalation)' 조항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구리 가격이 오르는 만큼 제품 판매 가격도 올라 외형적으로 매출이 크게 늘어나는 셈이다.
앞서 저렴하게 사둔 구리로 제품을 만들어 높은 가격에 판매하는 것도 긍정적이다. 다만 기업마다 상황에 따라 쌓아두는 재고량이 달라 평가 이익이 얼마나 되는진 가늠하기 어렵다. 또 구리는 가격 변동 폭이 커 미리 원재료를 대거 쌓아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가 집계한 증권사 리서치센터 실적 추정치에 따르면 대한전선의 올해 연결 기준 예상 매출액은 4조3980억원, 영업이익은 2290억원으로 예상된다.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1%, 78% 늘어난 수치다. LS전선의 지분 92.6%를 가진 LS의 올해 예상 매출액은 전년 대비 29% 뛴 41조841억원, 영업이익은 90% 오른 1조9996억원으로 예상된다.
향후 구리 가격이 강세를 이어갈 것이란 전망도 나오는 중이다. AI 서버 증설, 데이터센터 건설에 막대한 양의 전력과 전선이 필요해 구리 수요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어서다. 또 최근 판매가 늘고 있는 전기차에는 내연기관차보다 약 3~4배 많은 구리가 들어간다.
태양광·풍력 발전 인프라를 만드는 데에도 구리가 필요하다. 반면 칠레, 페루 등 주요 구리 광산의 조업 중단, 환경 규제 등으로 공급은 부족하다. 전선 업계 한 관계자는 "구리 가격이 오르고, 제품 판매 가격이 더 높아져도 글로벌 시장에서 전선 수요 증가세가 더 강력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국내 150여 중소 전선업체들에겐 구리 가격 상승이 부담이 될 것이란 의견도 있다. 중소 기업들은 주로 단기 수주, 수시 납품 구조로 계약해 원자재 가격이 오른다고 곧장 판가에 반영할 수 없어서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중소 기업들도 납품대금 연동제(주요 원재료 가격이 일정 비율 이상 변동하면 납품대금을 의무적으로 조정) 등으로 구리 가격 상승을 반영할 순 있으나, 현실적으로 협상이 어렵다"며 "규모가 작을수록 거래처 눈치를 보느라 매출액만 늘고 이익률은 개선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