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가스공사와 한국석유공사가 통합해 가칭 '에너지자원공사'가 설립될 예정인 가운데 에너지 업계 일각에선 앞으로 두 기관의 역할이 석유·천연가스 개발보다 비축에 방점이 찍힐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개발 기능이 약화할 경우 '자원 안보'가 우려된다는 목소리도 나오는 상황이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이달 초 '공공기관 기능개혁 추진 방안'을 발표하고 석유공사의 석유 비축 및 석유 탐사 개발 기능을 에너지자원공사로 이관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현재 석유공사는 국내외 석유 개발, 석유 비축, 석유 유통 구조 개선 등의 업무를 맡고 있다. 이 중 알뜰주유소 등 석유 유통 관련 업무는 석유관리원으로 이관하고 나머지 업무는 유지한다. 정부는 통합안에 '석유공사의 석유 비축 및 제한된 석유 탐사 개발 기능은 통합 공사로 이관한다'고 명시했다. 또한 정부는 에너지자원공사의 석유 개발과 관련해 '소규모 지분 투자'라는 단서를 달았다.
에너지 업계에선 정부가 든 단서 등을 근거로 에너지자원공사가 향후 석유·천연가스 개발보다는 비축에 중점을 둘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익명을 요청한 에너지 관련학과 교수는 "공기업이 자원개발을 주도하면 좋겠지만, 석유공사는 완전 자본 잠식 상태이고 가스공사는 상장된 공기업이라 가스공사가 자원개발을 적극적으로 하면 배임 이슈가 생길 수 있다"며 "그러니 직접 개발보다 소규 지분 투자라는 보수적인 방법을 제시했고, 결국 개발보다 비축에 방점이 찍힐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석유공사는 과거 진행한 석유 탐사나 석유 개발 관련 기업 인수합병(M&A) 과정에서 성과를 내기는커녕 부채만 느는 결과를 얻은 바 있다. 이로 인해 석유공사는 2020년부터 자산보다 부채가 많은 완전 자본 잠식 상태다.
여기다 가스공사의 출발점이 천연가스 개발이 아닌 천연가스 도입·보급에 있었다는 점도 자원 개발 역량 축소 가능성에 무게를 싣는 근거다. 석유공사와 가스공사의 인원수나 재무 상황을 비교하면 가스공사 위주로 통합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가스공사가 본래 지녔던 천연가스 등 자원 도입이 자원 개발보다 우선시될 수 있다.
에너지 업계 한 관계자는 "자원 개발을 제대로 하려면 개발 가능성이 있는 지역에 탐사 단계부터 참여해야 한다"면서 "과거 석유공사의 자원 개발 실패에 대해 책임을 크게 물은 적이 있는 만큼 정부가 적극적인 메시지를 주지 않는 한 향후 에너지자원공사에서 자원 개발은 소극적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 세계에서 천연가스 개발 자체가 위축될 것이라는 전망도 향후 에너지자원공사가 자원 개발에 나설 동력을 잃게 만드는 요소다. 업계에서는 전 세계 액화천연가스(LNG) 시장이 향후 4~5년 사이에 공급 과잉 상태로 재편될 것으로 보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글로벌 LNG 용량 추적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에서 2030년 사이에 전 세계에서 연간 약 2억5400만톤의 신규 LNG 수출 용량이 추가된다.
물론 데이터센터 건설 붐으로 인한 전력 수요 급증으로 LNG 수요가 동반 증가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LNG 시장은 공급 과잉 시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이 업계 중론이다. 블룸버그통신은 글로벌 LNG 시장은 신규 액화 프로젝트 가동에 힘입어 2027년부터 공급 과잉 국면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한 바 있다. 2030년에는 LNG 공급량이 수요량을 1500만톤 초과할 것으로 전망된다.
LNG 공급이 과잉될 경우 구매자의 가격 결정권이 커지는 만큼 가스공사로서는 천연가스 개발보다 도입과 비축에 더 많은 신경을 쓰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득이 될 가능성이 크다.
여기다 한국전력 산하 발전공기업 5곳이 내년 10월 '한국발전'으로 통폐합될 예정인 것도 천연가스 개발에 나설 동력을 떨어트리는 요인이다. 발전공기업이 각각 존재했을 때보다 LNG 구매 물량이 더 커져 공급처와 계약 시 협상력이 높아지는 만큼 직도입 LNG 물량을 더 늘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미 국내 LNG 직도입 물량은 증가 추세다. 민간LNG산업협회에 따르면 2021년 국내 도입 LNG 물량 중 직도입 비중은 19%였으나, 2025년에는 26%로 늘었다. 물량으로 봐도 같은 기간 가스공사가 도입한 물량은 3731만톤에서 3428만톤으로 8.1% 감소한 데 비해 민간과 발전공기업이 직수입한 LNG는 862만톤에서 1244만톤으로 44.3% 증가했다.
신현돈 인하대 에너지자원공학과 교수는 "정부가 석유 개발과 관련해 소규모 지분투자만 언급한 것은 과거와 같은 직접 개발은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며 "석유·천연가스 개발 지분 참여로 확보할 수 있는 자원은 한정적이라 '겉보기 자원 안보'에 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종세 한국해양대 에너지자원공학과 교수는 "석유공사가 자원개발 과정에서 실패를 했기에 자원 개발 기능이 축소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며 "공공기관이야말로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라도 자원 개발에 나서야 하는 주체라는 점을 상기하고 개발 광구의 성격에 따라 소규모 지분투자 등 자원 개발 방식에 한계를 두지 말아야 호르무즈 해협 봉쇄와 같은 위기 상황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정부는 에너지자원공사가 출범하면 규모가 커지는 만큼 해외 자원 개발 사업을 수행할 때 국제 협상력이 커지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석유·천연가스 통합 관리를 통해 해외 광구 입찰·협상 시 유리한 위치 선점 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산업통상부 관계자는 "자원개발 축소 의도는 없다. 효율성 높이려는 것"이라며 "석유공사가 자원개발을 못 한 건 부채 때문이었다. 부채는 자회사를 만들어 청산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