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의 군사적 긴장감이 다시 고조되면서 국제유가 역시 재차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역(逆)래깅(유가가 하락 안정될 경우 과거 비싸게 원재료를 들여왔다가 싸게 제품을 팔아야 하는 것)' 우려가 줄어든 데다 정제마진 강세가 이어지면서 정유사들이 하반기에도 실적 개선 흐름을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10일(현지 시각) 런던 ICE선물거래소에서 11월 인도분 브렌트유는 배럴당 107.63달러로 전날 대비 6.3% 상승했다. 5거래일 연속 올랐다. 뉴욕상업거래소에서 거래되는 10월 인도분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 가격도 배럴당 102.48달러로 전날보다 6.7% 올랐다.
국제유가는 지난 2월 발발한 미국과 이란의 전쟁으로 급등하며 5월에는 배럴당 110달러선을 돌파했다. 이후 두 나라가 휴전 협상에 돌입하면서 유가는 약세로 돌아섰고 지난 7월 초에는 배럴당 70달러선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한동안 안정된 흐름을 보였던 유가가 최근 빠르게 상승하고 있는 것은 미국과 이란이 다시 충돌하며 중동 정세가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멘에서 활동하는 친(親)이란 계열의 후티 반군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 석유 기업인 아람코의 주요 설비를 타격했다. 호르무즈 해협 인근에서는 이란 유조선이 미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이란 이슬람 혁명수비대(IRGC)는 미군의 공격에 보복을 예고한 상황이다. 양국이 외교적 해법을 찾지 못한 채 서로 충돌을 이어가면서 전쟁이 장기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다시 늘고 있다. 이에 브렌트유와 WTI는 지난 5월 19일 이후 가장 높은 수치까지 뛰었다.
국내 정유업계에서는 최근 다시 시작된 유가의 상승 흐름이 정유사들의 실적에는 호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종전으로 하반기에 유가가 크게 내릴 경우 우려됐던 역래깅 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게 줄었다는 이유에서다.
SK이노베이션과 GS칼텍스, 에쓰오일(S-Oil) 등 주요 정유사들은 올 상반기에 '래깅 효과' 등으로 인해 실적이 눈에 띄게 개선됐다. 래깅 효과란 과거 싸게 들여왔던 원유를 정제해 만든 석유제품을 유가 상승에 따라 비싸게 판매하는 것을 뜻한다.
SK이노베이션의 경우 1분기 매출액은 24조2121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5.2% 증가했고, 영업이익은 2조1622억원으로 흑자 전환했다. 2분기 들어서는 매출액이 29조1572억원으로 늘었고, 영업이익은 3조4873억원에 달했다.
에쓰오일도 상반기에 2조1961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지난해 같은 기간의 3655억원 영업손실에서 흑자 전환했다. 정유 사업 부문은 1분기에 1조390억원의 영업이익을 낸 데 이어 2분기에도 5324억원의 이익을 거두며 실적 개선 흐름을 이어갔다.
정유사 한 관계자는 "미국과 이란의 종전 협상이 진행됐던 상반기 말에는 유가 하락에 따른 역래깅 우려가 컸다"며 "하반기 실적은 상반기에 비해 뒷걸음질할 것으로 예측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중동 정세가 1~2개월 만에 다시 안정되기는 어렵다고 보이는 만큼 하반기에도 정유 사업 부문이 안정적인 수익을 낼 것으로 전망된다"고 덧붙였다.
유가가 상승하면 정유사들이 보유한 원유의 재고평가이익도 늘어난다. 정유업계는 각자 비축해 둔 원유의 규모가 다르고 도입 가격과 환율 등 여러 변수도 있지만, 유가가 배럴당 10달러 오를 경우 업체별로 약 2000억원의 평가이익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산한다.
정유사들의 수익 지표인 정제마진도 올해 말까지는 계속 상승세를 보일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정제마진이란 석유제품 판매 가격에서 원유 구매 비용과 정제 설비 가동 비용, 수송비 등을 뺀 값이다. 국내 정유 업계와 금융 시장에서는 일반적으로 싱가포르 복합정제마진을 기준으로 삼는데, 손익분기점은 4~5달러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정유업계에 따르면 지난 6월까지 배럴당 20달러대를 기록했던 싱가포르 복합정제마진은 7월에 배럴당 40달러대 후반까지 급등했다. 8월 들어서는 다시 내림세로 돌아섰지만, 여전히 손익분기점의 8배 수준인 배럴당 40달러선 안팎을 유지하고 있다.
정제마진이 줄곧 강세를 보이고 있는 이유는 주요 국가들의 설비가 훼손돼 석유제품 정제가 차질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22년부터 이어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올해 미국과 이란의 전쟁까지 발발하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러시아, 중동의 정유 설비가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고 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최근 수 년 간 서방 국가들의 주도로 친환경 에너지 전환 기조가 유지되면서 신규 정제 설비 증설도 매우 더디게 진행됐었다"며 "전쟁이 마무리돼도 파괴된 설비가 단기간에 복구되기는 어려운 만큼 정제마진 강세가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도 하반기 정유사들의 영업이익 추정치를 잇따라 상향 조정하고 있다.
에쓰오일의 경우 금융정보업체인 에프앤가이드가 집계한 3분기 영업이익 전망치(컨센서스)는 전년 동기 대비 약 360% 급증한 1조574억원이었다. NH투자증권은 지난 7일 보고서를 통해 에쓰오일의 3분기 영업이익이 컨센서스를 22% 이상 웃돈 1조2945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한투자증권은 SK이노베이션이 하반기에도 견조한 실적 개선을 흐름을 보이면서 올해 전체 영업이익이 9조2187억원으로 컨센서스를 5000억원 웃돌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유 사업 부문 영업이익은 상반기에 2조9000억원을 기록한 데 이어, 하반기에도 2조원에 이를 것으로 봤다.
이진명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지정학적 리스크가 완화된 이후 유가와 정제마진의 단기 조정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원유 조달은 우회 운송으로 먼저 회복되는 반면 정제설비 복구와 제품 재고 확충에는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