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력이 재무 구조 개선과 송전망 등 인프라 투자 확대를 위해 채권 발행을 대폭 늘려 자금을 조달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오는 2028년 총선을 앞두고 여론을 의식한 정부와 정치권이 전기 요금 인상을 쉽사리 결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25조 선납 협의…받아도 송전망 100조 투자엔 부족
6일 업계에 따르면 한전은 최근 삼성전자에 20조원, SK하이닉스에 5조원씩 총 25조원 규모의 전기 요금 선납을 제안하고 현재 실무 협의를 진행 중이다. 한전은 내년 말까지 매달 2조원씩 나눠 납부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납금은 지난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전기 요금 납부액을 토대로 산정됐다. 한전은 두 기업에서 25조원을 미리 끌어다 쓰고, 향후 5년 간 실제로 산정될 전기 요금에서 국고채 금리+15bp(0.15%포인트)를 할인하는 보상안을 제시했다.
이번 논의는 내년 말로 예정된 한전채 발행 한도 확대 조치 종료를 앞두고, 한전채 발행 대신 다른 자금 조달 방안을 찾기 위해 시작됐다.
과거 한전채는 자본금과 적립금 합산액의 2배 한도에서 발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한전의 재무 상태가 악화되면서 내년 말까지 한시적으로 채권 발행 한도를 5~6배로 늘리는 내용의 한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전쟁으로 국제 연료 가격이 급등했지만, 국내 요금을 제 때 올리지 못해 어려움을 겪게 된 한전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었다.
정부의 첫 대규모 재정 지원도 한전의 부담을 덜어줄 전망이다. 기후에너지환경부가 발표한 내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정부는 한전에 현금 출자 5000억원과 전기 요금 복지 할인 지원금 3500억원 등 총 8500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출자금 5000억원이 자본금 계정으로 반영되면 내년 한전채 발행 한도는 약 2조5000억원 늘어난다.
한전은 정부 지원에 더해 내년 말까지 삼성전자, SK하이닉스로부터 선납금 25조원을 확보하면 기존 한전채 발행 한도가 2배로 회귀해도 필요한 운영 재원을 마련하는 게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전 관계자는 "내년 종료되는 한전채 발행 한도 5~6배 확대 조치 연장은 고려하지 않으며, 기존 한도인 2배에서 자금 운용이 가능하도록 여러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 2028년 총선 앞두고 전기료 인상 대신 한전채 발행 늘릴 거란 전망도
그러나 시장에서는 한전이 채권 발행을 늘릴 거라는 우려가 여전한 상황이다.
한전은 재무 구조가 부실한 데다, 반도체 산업단지 추가 조성으로 송전망 인프라 확충에 막대한 투자비가 필요해 자금 조달이 시급한 상황이다. 한전의 총부채는 6월 말 기준 210조7000억원으로 하루 이자만 115억원에 달한다.
미국·이란 전쟁으로 국제 유가가 상승하면서 연료비 부담도 커지고 있다. 연료비는 한전의 이익과 직결된다. 여기에 향후 지역별 차등 요금제가 도입될 경우 연간 2조8000억~3조원 규모의 수입 감소가 예상돼 한전의 재무 건전성은 더욱 나빠질 수 있다.
기존 송배전망 확충 계획에만 100조원의 투자비가 책정됐으며, 3대 메가 프로젝트를 뒷받침하기 위한 추가 전력 인프라 구축을 위해선 더 많은 비용이 필요한 상황이다. 하나증권 리서치센터는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감안하면 송·변전 투자비가 최대 124조3000억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추산했다.
2028년 총선을 앞두고 전기 요금 인상 가능성이 낮은 점도 자금 조달 수단이 사실상 한전채 추가 발행 뿐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로 꼽힌다.
김진수 한양대 자원환경공학과 교수는 "전기 요금 정상화로 재무 구조를 개선하고 투자 여력을 만드는 게 근본적인 해법이지만, 어렵다고 본다"며 "2028년 총선을 앞두고 내년 종료되는 한전채 발행 한도 확대 조치를 연장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정연제 서울과학기술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도 "내년 여야 합의로 한전법을 개정해 한전채 발행 한도를 조정할 것으로 보인다"며 "반도체 호황에 따른 추가 세수를 한전에 자본을 투입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달 말까지 한전채 발행액은 12조2100억원으로 집계됐다. 한전채는 신용 등급 AAA급으로 정부가 보증하는 최우량 채권이다. 한전채가 시장에 쏟아지면 시중 자금이 한전채로 쏠려 다른 기업들의 회사채 금리가 상승하고 자금 조달이 위축되는 현상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