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시작된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장기화되고 세계 원유 정제 물량이 줄어들면서 석유제품 가격의 강세가 계속되고 있다. 특히 화물 운송이나 공장, 건설 현장 등 산업용 연료로 주로 쓰이는 경유는 수요를 대체하거나 소비를 줄이기도 어려워 휘발유보다 더 큰 폭으로 가격이 뛴 상황이다. 국내 정유사들은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리는 상황이다.

8월 23일 서울 시내 주유소. / 연합뉴스

4일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일 백악관에서 셰브런, 엑손모빌 등 주요 석유 기업 경영진과 회동했다. 미국 내 경유 가격이 급등해 갤런당 4.71달러를 기록하자, 석유 시장을 안정화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만남을 가진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일각에서는 미국 경유 소매 가격이 조만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2022년 기록한 최고치(갤런당 5.8달러)를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FT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석유제품 수출 금지 조치를 고려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인 2월 27일부터 9월 1일까지 국제 석유제품 시장에서 거래된 경유 가격은 배럴당 92.9달러에서 163.56달러로 76.1% 뛰었다. 같은 기간 휘발유 가격은 배럴당 79.64달러에서 119.03달러)로 49.5% 상승했다.

석유 제품 가격이 크게 오른 것은 정제 시설 부족으로 공급량이 줄었기 때문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7월 기준 전 세계 일일 원유 정제량은 8100만배럴로 전년 동월 대비 약 6% 줄었다.

IEA는 현재 전 세계 원유 정제량이 석유제품 수요보다 하루 평균 200만배럴 부족하다고 분석했다. 또 3분기 정제량이 추가로 하루에 37만배럴씩 감소할 것으로 봤다.

원유 정제량이 감소한 원인은 여러가지다. 우선 유럽의 정제 시설 폐쇄가 있다. 유럽 정유업계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또 환경규제 강화로 탄소배출권 구매 비용이 상승하자 2009~2024년까지 유럽 전역에서 약 30개의 원유 정제 시설이 영구 폐쇄됐다.

에너지 및 원자재 전문 시장분석업체 S&P 글로벌 에너지에 따르면 유럽에선 2025년 한 해 동안 하루에 약 50만배럴의 원유를 처리할 수 있는 정제 시설이 폐쇄됐다.

시장조사업체 스타디스타는 "셸, BP와 같은 주요 석유기업이 유럽을 중심으로 2025년부터 정제시설 폐쇄를 본격화했다"며 "2024년부터 오는 2029년까지 유럽은 하루에 약 1억배럴의 원유를 처리할 능력을 갖춘 정제시설이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유럽이 과거 부족한 석유제품을 들여왔던 러시아에서도 더 이상 수입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유럽연합(EU)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대(對)러 경제 제재 조치로 러시아산 석유제품 수입을 중단했다.

유럽이 중동과 아시아 등에서 석유제품을 수입하고 있던 상황에서 미국과 이란의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까지 봉쇄되면서 경유, 휘발유 가격이 급등했다.

전쟁으로 인해 정제 시설이 줄기도 줄었다. 대한석유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정제 처리량은 전년 대비 각각 5.8%, 0.8% 줄었다.

미국·이란 전쟁으로 쿠웨이트 국영석유회사(KNPC) 소속 주요 정제 시설 등 걸프만 연안의 원유 정제 시설 역시 파괴된 것으로 알려져 중동 지역 원유 정체 처리량은 지난해보다 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경유 가격이 큰 폭으로 상승해 휘발유 가격을 넘어선 것은 수요를 줄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휘발유가 주로 쓰이는 승용차 시장은 전기차나 하이브리드차, 대중교통 등으로 소비를 줄일 수 있지만, 경유는 화물 운송·농업·건설 중장비 등 주로 산업용 연료로 쓰인다.

여기에 군용 지상 장비 대부분이 경유를 연료로 사용하고 있어 전쟁으로 인한 수요가 더 늘어난 상황이다.

경유 가격 상승으로 국내 정유사들의 실적 개선 흐름도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경유 크렉 스프레드는 지난달 100달러를 돌파한 데 이어 2일에는 배럴당 106달러를 기록하면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경유 크렉 스프레드는 원유 1배럴 가격과 경유 1배럴의 판매 가격 차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정유사의 정제마진을 나타내는 지표다. 스프레드가 상승할수록 정유사의 이익은 급증한다.

실제로 국내 정유사들은 경유 가격 상승의 효과를 보는 중이다. SK이노베이션의 석유·정유 사업 자회사인 SK에너지는 올해 2분기 매출(13조2106억원)과 영업이익(6511억원)이 지난해 동기보다 각각 41.9%, 21.9% 상승했다.

에쓰오일, GS칼텍스, HD현대오일뱅크의 2분기 매출도 지난해 동기보다 각각 40.9%(11조3435억원), 55%(16조6724억원), 44.9%(9조4774억원) 늘었다. 또한 에쓰오일, GS칼텍스, HD현대오일뱅크는 올해 2분기 영업이익이 지난해 동기와 비교해 흑자 전환했다.

여기다 한국 정유사의 유럽향 경유 수출 기회도 늘 전망이다. 블룸버그통신이 입수한 선박 계약서에 따르면 한국에서 선적된 경유 약 9만톤이 9월 중 영국이나 네덜란드에 도착할 예정이다.

블룸버그통신은 "한국은 일반적으로 아·태 지역에 경유를 수출했지만, 유조선 프리아모스호는 1만9000km를 넘는 거리를 항해하며 유럽으로 향한다"며 "기존에는 경제적으로 타당성이 낮은 운송 경로가 필요하게 된 건 유럽의 디젤 가격이 아시아보다 너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정제 시설 확충이 단기간에 이뤄지기 쉽지 않고, 전쟁으로 파괴된 시설 복구에도 상당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며 "당분간 경유 가격은 오름세를 보일 전망"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