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이 SK하이닉스의 일본 공장 신설 의사를 밝히는 등 최근 일본 진출과 협력에 공을 들이면서, 박상규 전 SK이노베이션 사장이 주목을 받고 있다. 최 회장의 비서실장을 역임하며 최측근으로 꼽혔던 그는 실적 부진으로 SK이노베이션을 떠난 후 현재는 SK그룹의 일본 총괄 사장으로 근무 중이다.
2일 재계에 따르면 최 회장은 지난 31일 블룸버그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급증하는 인공지능(AI) 수요를 충족하고 생산 비용을 줄이기 위해 일본에서 메모리 칩을 생산할 수 있는 합작 공장을 건설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신설 공장 후보지로) 일본 전역을 살펴보고 있다"며 "전력과 용수가 풍부한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고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블룸버그는 SK하이닉스가 일본 공장 신설을 추진하기로 한 것은 일본 고객사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시장을 확장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일본의 플래시 메모리 제조사인 키옥시아는 SK하이닉스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사로 향후 공동 생산 가능성도 거론된다. SK하이닉스는 현재 베인캐피털 산하 특수목적회사(SPC)를 통해 일본 플래시 메모리 제조사인 키옥시아의 지분 14%를 보유 중이다.
최 회장은 2일 일본 아사히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키옥시아는 많은 강점을 가진 회사"라며 "키옥시아의 장래 전략 안에 SK하이닉스가 들어간다면 우리는 언제든 파트너가 될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최 회장이 일본에 대해 관심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일하면서 여러 차례 일본과 강력하게 손을 맞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단순한 경제 협력 차원을 넘어 경제 통합을 이뤄야 중국 등 경쟁 국가들과 맞설 수 있다는 뜻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지난해 일본 요미우리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은 완만한 경제 연대가 아닌 유럽연합(EU)과 같은 형태의 완전한 경제 통합이 필요하다"며 대표적인 분야로 인공지능(AI)과 반도체를 꼽기도 했다.
재계와 SK그룹 내부에서는 최 회장이 일본에서의 사업 의지를 드러내고 한·일 경제 통합론까지 주장하고 나선 데는 박상규 사장의 역할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그는 지난해 5월 SK이노베이션 사장직에서 물러난 이후 1년 넘게 일본 총괄을 맡으면서 일본 내 사업성을 타진하고 네트워크를 구축하는데 집중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박 사장은 한때 SK그룹 내부에서 유력한 부회장 후보로 이름을 올렸던 인물이다. 1964년생인 그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87년 SK이노베이션의 전신인 유공에 입사했다. 이후 SK에너지 소매전략팀장과 SK㈜ 투자회사관리실 임원, SK에너지 리테일마케팅사업부장 등을 지내며 주로 에너지 분야와 그룹 총괄 투자 부문에서 경력을 쌓았다.
박 사장은 특히 SK의 지주사 전환 등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최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난 2011년 SK㈜ 비서실장 전무로 발탁됐고 이후 SK네트웍스 총괄 사장과 SK엔무브 사장을 거쳐 2024년 3월 SK이노베이션 총괄 사장을 지냈다.
SK그룹 내에서 박 사장은 최 회장의 신일고, 고려대 직속 후배인 이형희 SK수펙스추구협의회 커뮤니케이션위원장(부회장) 등과 함께 총수의 가장 가까운 측근 중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했다.
승승장구하던 박 사장은 지난해 5월 SK이노베이션의 실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SK이노베이션은 배터리 자회사인 SK온이 전기차 시장 침체로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데다, 정제 마진 약세로 주력 사업인 정유 부문까지 타격을 받으면서 실적이 크게 꺾였다.
박 사장은 2024년 말 '알짜 계열사'인 SK E&S까지 합병하며 SK이노베이션의 재무 구조 개선에 나섰지만, 지난해 들어서도 실적 부진이 이어졌고 결국 그는 취임 1년 2개월 만에 사장직을 내려놨다.
다만 최 회장의 뜻에 따라 박 사장은 SK그룹에 남아 일본 총괄 사장으로 부임했다. 이를 두고 재계와 그룹 내부에서는 박 사장이 SK의 일본 진출과 협력 관련 실무를 진두지휘하라는 최 회장의 특명을 받고 새로운 역할에 나선 것이라는 해석이 많았다. 실제로 그가 일본 총괄 사장으로 임명된 후부터 최 회장은 대외적으로 일본과의 경제 통합과 사업 진출 의지를 여러 차례 밝혀 왔다.
박 사장이 SK의 일본 사업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은 데는 그가 '에너지통(通)'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최 회장은 HBM(고대역폭 메모리)과 고용량 서버용 D램 등 칩을 판매하는 SK하이닉스 뿐이 아니라 SK그룹 전체가 글로벌 AI 시장을 주도하는 핵심 기업으로 영역을 확장하기를 원하고 있다. 특히 AI 데이터센터 건설은 가장 관심을 갖고 추진하는 사업이다. 그는 한국 뿐 아니라 글로벌 시장 곳곳에 AI 데이터센터를 짓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최 회장은 지난 6월 니혼게이자이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엔비디아와 협력해 일본에 기가와트(GW)급 차세대 AI 전용 데이터센터인 'AI 팩토리'를 구축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반도체 공장과 AI 데이터센터는 대규모 전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오랜 기간 SK그룹 내 에너지 관련 계열사에서 잔뼈가 굵은 박 사장이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재계 관계자는 "SK그룹은 최근 수 년 간 지속했던 긴축 기조에서 점차 글로벌 시장에서 영역을 확대하는 확장 기조로 전환하고 있다"며 "특히 미국과 함께 최 회장이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일본에서 최측근인 박 사장의 역할에 많은 기대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