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피해 홍해로 우회하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수송에 또 다른 변화가 나타났다. 홍해 남쪽 입구인 바브엘만데브 해협 일대까지 후티 반군의 위협이 커지면서 사우디 서부 얀부에서 수에즈운하 남쪽 인근의 이집트 아인수크나로 이어지는 홍해 북부 항로가 사우디 원유 운송길로 부상한 것이다.
지금까지 사우디 얀부~이집트 아인수크나 구간에는 한 번에 원유 약 200만배럴을 실을 수 있는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이 주로 투입됐다. 한 번에 더 많은 물량을 실을 수 있는 대형 선박일수록 운송비를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VLCC보다 작은 수에즈막스 5척이 이 구간에 처음 투입됐다. 수에즈운하 통과 물량이 늘면서 수에즈운하를 만재 상태로 지날 수 있는 수에즈막스 수요가 커진 것이다.
◇원유 우회로 바뀌자 수에즈막스 몸값·운임 급등
1일 조선·해운업계에 따르면 최근 그리스 선사 나프토마르는 2024년 건조된 수에즈막스 '브리스톨' 중고선을 1억2300만달러에 사들였다. 지난 6월 같은 급의 중고선 2척을 척당 1억1000만달러에 산 것보다 12% 비싼 값이다.
적재능력이 두 배인 VLCC를 새로 건조할 때 가격인 신조선가가 현재 약 1억3100만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2년 된 중고 수에즈막스 한 척 가격이 새 VLCC의 94%까지 높아진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호르무즈에 이어 홍해 남쪽까지 불안해지면서 당장 쓸 수 있는 수에즈막스를 선점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다"고 말했다.
수에즈막스가 귀해진 건 사우디 원유 운송의 우회로가 또 한 번 바뀌었기 때문이다. 사우디는 동부 유전과 홍해 연안 얀부를 잇는 약 1200㎞ 길이의 동서횡단 송유관을 갖고 있다. 동부에서 생산한 원유를 육로 송유관을 통해 서부 홍해 연안 얀부까지 옮기는 방식이다. 미·이란 전쟁으로 호르무즈 통항이 사실상 막히자, 사우디는 이 송유관을 우회로로 활용했다. 동부 원유를 서부 얀부까지 옮긴 뒤 배에 실어 홍해 남쪽 바브엘만데브를 거쳐 아시아로 보내는 방식이다.
하지만 지난 7월 후티가 사우디 연계 선박을 위협하면서 이 길마저 불안해졌다. 7월 초 하루 350만배럴을 웃돌던 사우디 원유의 바브엘만데브 통과량은 8월 들어 사실상 제로 수준으로 떨어졌다.
남쪽 길이 위험해지자 사우디 원유는 반대로 북쪽 수에즈로 향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수에즈운하를 직접 지나고, 일부는 이집트의 수메드 송유관을 이용해 지중해로 넘어간다.
여기서 수에즈막스의 장점이 극대화된다. VLCC는 원유 200만배럴을 가득 실으면 흘수(배가 물에 잠겨 있는 부분의 깊이)가 깊어 수에즈운하를 그대로 지나기 어렵다. 반면 수에즈막스는 약 100만배럴을 만재하고도 통과할 수 있다. 항로가 바뀌면서 수에즈운하를 만재 상태로 지날 수 있는 수에즈막스의 쓰임새가 커진 것이다.
수에즈막스 운임도 가파르게 뛰었다. 흑해~지중해 항로의 수에즈막스 운항수익(TCE)은 지난 8월 21일 하루 40만달러에 육박했다. 전체 수에즈막스 평균 운항수익은 하루 26만9824달러로, 적재량이 두 배인 VLCC(23만4821달러)마저 웃돌았다.
◇수에즈막스 품귀, 신조 발주로 번져
국내 조선소에도 수에즈막스를 찾는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수에즈막스를 주력으로 짓는 대한조선은 올해 들어 이 선종 17척을 수주하며 2029년 말까지 건조 일정이 사실상 찼다. 대한조선은 현재 2030년 인도 물량을 팔고 있다.
선주들 사이에선 비싼 가격을 감수하면서 2029년 건조 슬롯을 확보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지난 7월 말 튀르키예 선주와 수에즈막스급 원유운반선 2척을 2029년 8월까지 인도하는 조건으로 척당 약 9300만달러에 계약했다. 이는 계약 직전 수에즈막스 신조선가(8653만달러)보다 약 7.5% 높은 수준이다.
업계에서는 수에즈막스 강세가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호르무즈 통항량이 아직 평시 수준을 크게 밑도는 데다, 홍해 남쪽의 후티 위협도 남아 있어서다. 업계 관계자는 "호르무즈가 정상화돼도 선사·보험사가 위험 판단을 낮추고 기존 항로로 선박을 되돌리는 데는 꽤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주요 조선소의 수에즈막스 건조 일정도 3년 후까지 차 있어 단기적으로 중고선과 용선료 강세가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