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쟁 여파로 올해 초대형 원유 운반선(VLCC) 시장의 호황이 이어지자, 일각에서 유조선 시장의 공급 과잉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유조선 운임 가격이 급등하고 중동 산유국들의 대형 유조선 확보 수요가 증가하며 올 들어 VLCC 건조 주문은 역대 최대 수준으로 늘고 가격도 치솟았다.

조선·해운업계에선 최근 VLCC 발주 호황이 약 20년 전 호황기와 닮았다는 점에서, 당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공급 과잉에 따른 시장 침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28일 영국 해운·조선 시장조사업체 마리타임스트래티지스인터내셔널(MSI)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전 세계에서 신규 건조 계약이 체결된 VLCC는 177척으로 집계됐다. 상반기 발주된 VLCC의 총 재화중량톤수(DWT)는 5450만DWT로 역대 연간 최대 기록인 2006년의 3260만DWT를 넘어섰다.

한화오션이 건조한 초대형 원유 운반선(VLCC·Very Large Crude Carrier). /한화오션

VLCC 신조 가격도 척당 1억3000만달러를 넘어섰다. 이는 척당 1억5000만달러를 돌파했던 2008년 이후 가장 비싼 수준이다. 한화오션이 지난 4월 그리스계 선주 칼로바마리타임으로부터 수주한 30만DWT급 VLCC 1척의 건조 가격은 1억3000만달러로, 지난해 8월 수주 가격(1억2500만달러) 대비 4%가량 높아졌다.

올 들어 VLCC 발주 수요가 급증하고 가격이 급등한 한 원인으로 중동 산유국들의 자체 선박 확보 움직임이 꼽힌다. 원유 거래에서는 매입 측인 정유사나 트레이더가 유조선을 준비해 산유국 선적항에서 실어 가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판매자인 산유국이 선박을 책임질 때도 직접 선박을 보유하기보다는 해운사에서 빌리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지난 2월 중동 전쟁 발발 후 호르무즈 해협 운항이 마비되다시피 하면서 산유국들은 자체 VLCC 선대 구축에 나섰다. 원유 운송에 차질이 커지자 수출을 지속하기 위한 방안으로 직접 VLCC 확보에 나선 것이다. VLCC는 원유 운반선 중 가장 큰 선박군으로, 한 번에 약 200만 배럴의 원유를 운송할 수 있다.

조선·해운업계에선 올해 발주한 선박들이 다 만들어져 인도될 2028~2029년 유조선 시장에서 공급 과잉 현상이 벌어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통상 건조 계약 후 2~3년 후에 배가 인도되는 것을 감안하면 새 VLCC가 시장에 투입되는 시점에 공급이 수요를 초과해 운임이 하락하고 선박 수익성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상반기 말 기준 VLCC 발주잔량은 310척 이상이다. 글로벌 선박중개업체 BRS에 따르면, 2027년 60척, 2028년 127척, 2029년 이후 125척이 각각 인도될 예정이다. 현재 운항 중인 VLCC 선대 규모 대비 VLCC 발주잔량 비율은 35%로 급등했다.

MSI는 "올해 상반기에 발주된 VLCC의 약 83%는 2028년과 2029년에 인도될 예정으로, 이는 향후 VLCC 시장의 수급 균형에 큰 부담을 줄 수 있다"고 분석했다.

VLCC 발주잔량이 2008년 이후 가장 많은 수준까지 늘어나면서 당시와 유사한 공급 과잉 우려도 제기된다. 앞서 2004~2008년 신흥국 중국·인도 등의 원유 수입 증가에 따른 원유 물동량 확대 기대 등의 영향으로 VLCC 발주가 크게 늘어났다. 특히 2008년에는 1~8월 VLCC 약 100척이 발주되며 정점을 찍었는데, 이는 2007년 연간 발주량의 3배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2008년 하반기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시장 분위기가 급변했다. 호황기에 주문했던 배들이 2009년부터 인도되기 시작하면서 경기 위축에 따른 수요 감소와 선박 공급 증가가 맞물려 공급 과잉 압력이 커졌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VLCC 신규 발주는 급감했다.

그리스계 해운사 TMS그룹 창업자 조지 이코노무는 지난 4월 그리스에서 열린 한 국제 해운 전시회에서 "현재 유조선 호황은 2004~2008년 유조선 시장 호황기보다는 다소 낫지만, 이 상황이 지속되면 유조선 산업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했다.

현재 상황은 2008년과 다르다는 반론도 있다. 글로벌 선박중개업체 브레이머는 "최근 유조선, 특히 VLCC 발주 급증은 실제 우려 요인이긴 하지만 노후 선박 교체와 친환경 연료 선박 수요를 감안하면 새 선박 투입량이 증가한다고 해도 전체 선박 증가 폭은 감당 가능한 수준에서 유지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