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조선소들이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등 고부가가치 선종 위주로 수년치 일감을 채운 사이 글로벌 선사들이 중국 조선소로 컨테이너선 건조 물량을 몰아주고 있다. 중국 조선소들은 생산능력을 대규모로 확충하면서 글로벌 컨테이너선 선사들이 원하는 인도 일정을 맞추며 수주를 독식하고 있다.
중국 조선소들은 특히 과거 한국 조선소들의 영역이었던 초대형·고부가 컨테이너선까지 전 선형을 아우르고 있다. 특히 정치적으로 앙숙 관계인 대만의 해운사마저 중국 조선소에 발주를 시작한 상황이다.
25일 영국 조선·해운 분석 기관 클락슨리서치와 조선업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에 중국은 전 세계 컨테이너선 발주 물량(약 380척)의 80% 이상을 가져갔다. 한국은 10~15%의 신규 컨테이너선 건조 물량을 확보했다.
올 들어 MSC·CMA CGM 등 주요 글로벌 선사들이 대형 컨테이너선 신조 발주를 재개한 가운데 중국 조선소들이 이 물량을 흡수 중이다.
스위스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 컨테이너 선사 MSC는 지난 6월 중국 민영 헝리집단 산하 헝리중공집단에 2만TEU (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컨테이너선 10척을 확정 발주했다. 10척을 추가 발주할 수 있는 옵션도 설정했다.
헝리중공집단이 만드는 배는 액화천연가스(LNG) 이중 연료 추진 방식의 초대형 컨테이너선이다. 통상 선복량 1만8000TEU급 이상 컨테이너선은 초대형으로 분류된다. 특히 2만TEU급 이상은 메가 컨테이너선으로도 불린다. 헝리중공업은 2029년 상반기부터 이 배들을 인도할 예정이다.
MSC는 약 1000척의 컨테이너선을 운용하는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사다. 현재 120여척의 컨테이너선 발주잔고는 모두 헝리중공을 포함한 중국 조선소들이 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 3위 선사인 프랑스 CMA CGM도 지난 6월 헝리중공에 중소형 컨테이너선 6척을 발주했다. CMA CGM은 주로 한국 조선소들이 건조해 온 2만TEU급 이상 컨테이너선을 최근 몇 년간 중국 조선소에 몰아주는 추세다. 지난해 11월엔 중국 최대 조선업체인 중국선박집단(CSSC) 산하 다롄조선에 2만2000TEU급 LNG 이중 연료 추진 컨테이너선 6척(옵션 4척 별도)을 발주했다.
CMA CGM 올해 5월과 7월에 지난 2023년 양쯔장조선에 발주한 10척의 2만4000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의 1호와 2호 선박을 인도받았다. 현재 프랑스 국기를 달고 운항하는 컨테이너선 중 가장 큰 규모의 배다.
세계 2위 선사인 덴마크 머스크(Maersk)는 중국 민영 신스다이조선에 올해 2월 1만8600TEU급 중소형 컨테이너선 8척을 발주했다. 선박 인도 시기는 2029~2030년이다.
조선업계에선 올해 컨테이너선 신규 주문이 대부분 중국 조선소로 향하는 가장 큰 이유로 2029년 상반기 인도 가능 여부를 꼽는다. 중국 조선소들은 독(건조 공간) 확장과 설비 증설에 속도를 내며 초대형 컨테이너선부터 대형 항만과 중소형 항만을 오가는 소형 피더선까지 생산능력을 대거 확충했다. 중국 조선소들이 한국 조선소와 비교해 다양한 선종을 건조할 수 있는 여력을 갖췄기 때문에 컨테이너선 선사들이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것이다.
중국 조선소들의 친환경 이중 연료 컨테이너선 건조 기술력이 높아진 점도 중국으로 발주가 몰리는 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한국 대형 조선 3사는 LNG 운반선과 FLNG (부유식 LNG 생산·저장·하역 설비) 등 고부가·고선가 선종 위주로 수년치 일감을 쌓아둔 상태다. 2029년 상반기 인도 슬롯도 고선가 가스선 중심으로 채워졌다.
최근 대만 완하이해운이 중국 조선소에 컨테이너선을 발주하기 시작한 것 역시 인도 가능 일정 차이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완하이해운은 그간 주로 한국 조선소에 선박 건조를 맡겼으나, 지난해 12월 CSSC 산하 황푸원충조선에 6000TEU급 컨테이너선 6척을 발주하며 처음으로 중국 조선소를 선택했다.
완하이해운은 이달에도 CSSC 산하 와이가오차오조선에 총 계약액 9억8000만달러 규모의 컨테이너선 8척을 발주했다. 9200TEU~1만1000TEU급의 친환경 컨테이너선이다. 이 선박들 역시 2029년부터 인도될 예정이다.
이재혁 LS증권 애널리스트는 "한국 조선소들은 전략적 선별 수주 방침에 따라 2029년 하반기 슬롯도 가스선 중심으로 채우는 전략을 지속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2030년 이후 인도분부터 고부가 컨테이너선 위주로 기회를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