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석유 최고 가격제' 시행 이후 정유업계가 입은 손실 규모를 산정하는 절차가 진행 중인 가운데, 정유사 간 기류가 미묘하게 엇갈리고 있다. 당초 정유업계는 정부의 석유제품 가격 통제로 입은 손실 규모가 정부 추산치를 훨씬 뛰어넘는다며 한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최근 검찰이 정유사들을 가격 담합 혐의로 기소한 데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추가 조사 등 사법 리스크가 불거지자, 당초 강경했던 입장과 달리 정부안을 조기 수용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오면서 업체 간 온도차가 커지고 있다.
24일 정부에 따르면 산업통상부는 지난 22일 0시부터 한 달간 적용될 9차 석유 최고 가격을 기존 8차 수준에서 동결한다고 발표했다. 석유 최고 가격제는 3월 13일 처음 시행된 후 6개월째 이어지게 됐다.
미국, 이란 갈등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자, 정부는 국제 유가 급등에 대응하기 위해 국내 휘발유, 경유 등 석유 제품 가격에 상한선을 씌우는 석유 최고 가격제를 시행했다.
정부는 인위적인 석유 제품 가격 통제로 국내 정유 4사(SK에너지·HD현대오일뱅크·GS칼텍스·에쓰오일)가 손해볼 것을 감안해 일정 금액을 사후 보전해주기로 했다. 지난달 손실 보전 재정 지원 고시를 마련했고, 전문가들을 모아 '최고액 정산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정부는 정유사 손실 산정 시 원가(원유 도입비·생산 및 판매비·기타 비용)+적정 마진을 기준으로 보상하겠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당초 정부는 6개월 제도 유지를 전제로, 4조2000억원의 예비비를 편성했는데, 현재까진 예비비 범위 내에서 충분히 대응 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반면 정유사들은 석유 최고 가격제가 적용되지 않았을 때의 통상적인 시장 거래 가격, 즉 국제 석유 제품 시세와 최고 가격 간 차액을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손실 예상 금액은 정유사당 수조 원에 달해 정부가 편성한 예비비가 부족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향후 유가 하락에 따른 재고 자산 평가 손실까지 보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다 최근 검찰이 HD현대오일뱅크, SK에너지 등 정유사들을 가격 담합 혐의로 기소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검찰은 두 정유사가 2024년 7월부터 올해 2월까지 가격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서로 가격 정보를 교환한 '담합 행위' 혐의로 이들을 기소했다. 지난 20일 열린 첫 공판에서 정유사들은 가격 담합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이어 공정위는 이달 초 정유 4사가 주유소에 타사 제품 판매를 금지했는지 살펴보기 위해 현장 조사를 진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행위는 공정거래법 45조 1항 7조 위반이다. 가격 담합에 이어 새로운 법 위반 행위가 있는지 조사에 나선 것이다.
당국의 조사가 시작된 후 사법 리스크가 부담스러워진 일부 정유사를 중심으로 "정부 기준을 수용하고 조기 정산을 받아 리스크를 줄이자"는 기류가 형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우선 정부로부터 정산을 받는 게 중요한 상황"이라며 "원가 기준인 정부안을 수용하고, 최대한 협조해 리스크를 줄이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반면 사후 불복을 통해서라도 보전금을 더 받아내야 한다는 강경론도 있다. 각 사당 예상 보전 규모가 1조원 안팎에 그쳐 손실을 메우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일각에선 그룹의 오너 리스크가 부각된 정유사부터 정부에 적극 협조하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한다.
다른 정유사 관계자는 "일부 정유사의 입장이 제도 시행 초기와 달라졌다"며 "손실 보전 규모를 산정하고, 정부와 조율하는 과정에서 기업 간 이해관계가 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는 상반기(3월 13일~6월 30일) 발생 손실분에 대한 1차 정산 절차를 진행 중이다. 최고액 정산위원회 심의를 거쳐 11~12월 중 1차 보전금을 지급할 계획이다. 기존 편성된 예비비 4조2000억원 범위 내에서 대응이 가능하다는 입장이지만, 연말까지 제도가 이어질 가능성에 대비해 추가 재원 검토도 병행하고 있다.
정유업계는 1차 정산 결과가 2차 정산 기준이 될 것으로 보고, 1차 정산 기준에 주목하고 있다.